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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기고

[책 소개] 못다핀 들국화/ 이종철

1953년도부터 2008년도까지 편년체로 쓰여진 내용을 통해 근현대사에서 한 개인의 삶과 관련된 내용을 통해 그 시대의 모습을 들여다 볼수가 있어서 시리즈로 게재하고자 한다.

 

우리투데이 이승일 기자 |  이 책은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에 살던 고(故) 이종철씨의 장례 이후에 발견된 노트 2권에 담긴 내용을 원문 그대로 만든 책이다.
발간 목적은 1953년도부터 2008년도까지 편년체로 쓰여진 내용을 통해 근현대사에서 한 개인의 삶과 관련된 내용을 통해 그 시대의 모습을 들여다 볼수가 있어서 시리즈로 게재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1953년 3월 2일 제2고향 청도
경북 안동군 월곡면 가류동에서 태어난 나는 증조부, 고조부님의 무관심과 박대속에 아버지께서는 어머니와 어린 우리 4남매를 데리고 총 6명이 큰 누님만 안동에 남겨둔채 수백리 이곳 청도로 왔다.
타향의 땅에 먼저와 한약방을 하시는 중화어른은 고성 이씨 17세(世)의 셋째 자제분인 합곡파로써 4째 자제인  우리 자곡파와는 아주 가까운 친척 간이다. 
일찍 고성이씨 13세(世) 深파인 집성촌으로 청도 명대란 곳은 고성 이씨만 200세대를 이루고 살아가는 이곳으로 이사오도록 주선하신 분으로 아버지께서 무일푼으로 이곳으로 이사를 와 우리 식구들을 위해 남에 일, 남의 농토 농사일로 생계를 유지하도록 해주었다. 


고성 이씨 12세(世) 3자였던 이괄 할아버지의 역모난으로 우리 고성 이씨 본을 철성 이씨로 바꾸어 청도, 안동 여러곳으로 숨어 살아왔던 이곳 명대란 곳은 숨어 살기에는 안성맞춤의 좋은 장소로서  지금까지 수 많은 전란중에서 한번도 군인의 말발굽이 미치지 않은 곳으로 6.25 때는 서울특별시의 피난민들이 피난 온 곳으로 그당시 이승만 대통령께서 직접 이 곳을 지나시면서 마이크를 통해 북진정책을 외치던 곳이기도 했다.

 

태백산맥의 끝 부분으로 웅장한 아차산맥이 우리 동네를 숨겨주기라도 하듯 솟아 있고 운문사에서 흘러오는 깨끗한 물이 살기 좋은 청도 명성을 이루어 서며 때로는 우리 동네 넓은 평야에 풍년을 가져다 주는 물줄기로서 굽이 굽이 흘러 유천에서 청도산성에서 흐르는 물과 마주쳐 밀양에서 큰 낙동강과 합류하여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문살에 희미하게 문살이 밝아온다.
내가 눈을 떳을 때는 벌써 내 옆에서 주무시던 어머니 아버지는 벌써 밖을 나가시고 옆에 계시지 않았다.
어머니께서 밖에 나가시면서 내게 덮어주신 무명 이불 때문에 나는 따스한 온기에 일어나기 싫었다. 그러나 눈을 떴다.
몇권 안되는 국민학교 교과서들이 아버지께서 마련해 주신 나무 판자 책꽃이에 나란히 꽃혀있고, 어머니께서 오늘 내가 입을(형이 입던) 무명 학생복(광목을 검게 물들인)이 벽에 걸려있다.
“그래 일어나자! 오늘이 국민학고 졸업식이지, 하나, 둘, 셋 일어 나자”

 

아침 일찍 일어나신 아버지께서 소죽솥에 소죽을 끊이신 탓으로 방 아랫목은 따뜻하다 못해 뜨거울 정도다.
“아버지! 벌써 소죽 다 끓었어요?” “그래 더 자지 벌써 일어났나” “예!”
오늘따라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 늙어 보였다.  우리 식구를  데리고 고향 안동을 떠나 이곳 고성 이씨 집성촌에 오두막 3칸을 마련하여 이곳에 보금자리를 옮기신지도 어언 11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내 나이 2살인 1942년에 누나들 등에 업혀 이곳에 와서 오늘날까지 아버지께서 아무 기반도 없이 오직 당신의 육체만 의지하며 살아 온지 어언 11년째, 그동안 누나 2명은(큰누나 이창식, 작은누나 한현주) 출가하고 현재 형제뿐인데 국민학교를 졸업한 형은 대구로 남의 집 가게로 가고 지금은 나도 어엿한 국민학교 졸업생이 되었다.

 

아버지께서 소죽솥 뚜껑을 제치고 우물에서 길러온 물로 내 세수 물을 부어주신다.
이때, 부엌에서 치마폭에 손을 닦으시며 나오신 어머니께서 “철아! 빨리 세수하고 학교가야지”
“예 엄마!”
흰 무명 치마자락이 밥 짖는 불 끄름에 그을려 흰빛 마져 볼 수 없는 치마에 손을 닦으시면서 말씀하시는 그리움과 보고 싶은 사랑하는 엄마의 훌륭한 모습, 그토록 찢어지는 가난과 생활하면서도 한 번도 내게 짜증과 불편을 말씀 안 하시고 항상 인자하신 모습 그대로의 보고싶은 어머니의 얼굴에도 아버지처럼 잔주름이 가득했다.


그토록 아름다운, 인자하신 어머니 품을 이제는 나도 부모님의 두꺼운 껍질을 깨고, 나도 저푸른 창공에 무서운 독수리 같이 맛나고 좋은 음식을 어머니께 꼭 많이 바치리라, 나는 생각하며 결심했다.
고개 숙여 속삭였다, ‟엄마 사랑해!”

 

이제는 부모님처럼 괴목이 다된 돌담에 기대있는 우리집 보배인 살구나무도 꽃방울이 이제 막 터져 나올 듯, 아침을 알리는 참새 때들이 무리 지어 날아와 오늘 내 졸업을 축하라도 하듯 지저긴다.
아버지께서 몇해 전 새로 지은 마구간에 귀여운 누렁이는 아버지께 식사를 달라는듯 마구간에서 코를 내어 밀고 웃으면서 왔다 갔다 하고 있다.
“철아!” “예”
“빨리 세수해 소죽 주어야겠다.” “예 아버지”
나는 소죽 솥뚜껑에 있는 물을 대야에 담을때 아버지께서 열어준 닭장에 있던 닭들이 활개를 치며 마당에 맴돈다.
“아버지! 조금 있다가 열어주지 이따요”
내게 잘 따르는 장닭 한마리가 내 옆에 젖은 물을 머금고 하늘을 보고 웃고 있다.
나는 바쁘게 세수를 하고 밥상을 갖고 먼저 들어가신 어머님의 뒤를 따라 방에 들어갔다. 엄마는 오늘은 특별한 날인듯 아버지, 어머니, 나 세사람 밥 그릇 모두 흰 쌀밥이 소복히 담겨져 있고 특별한 날만 상위에 놓이는 계란찜, 가운데 된장국 그릇에 향긋한 된장 냄새가 풍겨 나는 식욕이 솟구쳐졌다.
“엄마! 고마워요. 저 오늘 졸업하면 아버지, 어머니 농사일 많이 도와 드리겠습니다.”
내 옆에서 식사하시던 엄마가 무언가 내게 미안한 마음이신지 내 머리를 쓰다듬으시면서 말씀하셨다.
“철아 미안하다” “엄마 괜찮아요”

“우리가 어떻하더라도 너를 중학교에 보내야 했는데, 너도 알다시피 계속되는 흉년에 먹고 살기조차 힘이들어 너를 ……” 하시며 어머니 눈에 눈물이 흐른다.
“엄마 괜찮아요”
“우리 집보다 몇배 잘사는집도 못 보내잖아요” “철아 내가 그렇게 생각해주어 너무 고맙다”
나는 나도 모르게 엄마의 따뜻한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엄마의 행복한 사랑이 내 가슴에 사무친다.
“엄마 고마워요”
내 등을 쓰다듬던 어머니께서 “철아 늦겠다 빨리 준비해!” “예 엄마!”
나는 재빠르게 일어났다. 벽에 걸어둔 학생복 형이 입던 그 옷을 얼마나 입어보고 싶었는가, 그러나 형이 무섭고 너무 커서 입지 못했는데 몇일전 옷을 고쳐 오신 것이었다. 
나는 무궁화 꽃이 그려진 단추를 끼우며 너무 좋았다. 그리고 행복했다.
“아부지, 엄마~봐요!”
“그래 우리 철이 잘 어울려”
새것도 아닌 형이 입던 옷 고친것인데 이토록 좋아하는 내 모습을 보고 가슴아파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위해 “엄마 좋지!”
하며 활짝 웃었다. 나는 거울에 내 모습까지 보았다. 엄마는 일어 나시더니 내 몸을 얼싸않으시며 “철아 미안하다”
그리고 네 볼에 입 맞춤을 주었다. 엄마도 이제야 행복해 보였다. “아버지, 어머니 다녀오겠습니다!”

아버지는 지게를 지고 산에 가시고, 내 등뒤에서 엄마는 말씀하셨다.
“내 설거지 빨리하고 나도 가볼께!” “예 엄마!”
싸리나무로 얼기 설기 엮어만든 싸리문 대문을 열고 학교길로 뛰어갔다.

6년여란 세월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다니던 길이였건만, 웬지 오늘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골목마다 높다랗게 쌓여진 돌담위에는 아직 완전한 잎이 아닌 새싹들의 움이 지금 막 두꺼운 껍질을 뚫고 나올듯 울룩불룩 하게 솟아 오르고 있다.
그리고 가을이면 마치 감터널처럼 붉은 감들이 이집저집 감나무들이 엉키어져 마치 감나무터널처럼, 그 사이 유독 익은감, 홍시를 친구들과 따 먹던 것들이 생각이 났다. 이곳저곳에서 친구들이 뛰어 나올 듯 ……
어느덧 학교 정문에 들어섯다.


우리 학교 매전국민학교 가장 자리에 6년 동안 묵묵히 하루도 빠짐없이 비바람 폭풍우에도 무언으로 우리를 지켜 주던 친우이자 동행자인 이 고목 느티나무, 여름이면 햇살을 가려주며 ……
마치 우리 들은 참새떼처럼 모여 지내던 곳에 오늘도 많은 학생들이 모여 있건만 나는 그 곳을 가지않았다. 발길을 재촉하여 그리운 친우들을 먼져 보기 위해서다. 나와 창수 우리의 자리는 조금 떨어져 있어 우정의 마음은 항상 함께 지나간 6년 동안 언제나 우리는 둘이 되며 양가 부모님까지 가까워지게 한 우리의 우정은 우리반 학생 전원이 알고 있었다.


느티나무 아래 친구들보다 지금 나를 기다리고 있을 친우 이창수를 만나기 위해 교실문을 열자 저곳에서 손을 든 친우 이창수 우리는 서로 아무것도 모른채 포옹했다. 
친우 창수의 가슴이 따뜻했다.


둘은 금세 눈에는 …….
이때 우리를 바라본 반 친구들의 박수 소리에 우리는 떨어지며 얼굴을 붉혔다. 내게 떨어진 창수는 말했다.
“철아! 너 오늘 너무 근사해”
처음으로 입고 온 양복 때문이었다 생각 했다. “아니. 너도 입었잖니!”
부자집 아들로 태어난 창수는 항상 양복 차림으로 학교에 오기 때문에 나는 창수 옷에는 관심이 없었다.
“철아 그것이 아니고” 창수는 얼굴이 빨개졌다. “그럼 무었 때문에?”
“처음으로 이곳에서 너를 안았을때 그 기분이 이상했어” “창수야 너도!”
우리는 누가 있어도 신경쓰지 않은채 두 손을 꼭 쥐었다. “철아!”
“나 우리 아버지께 부탁했어” “무슨 부탁”
“너 6년 개근상 받을때 사진 찍어 달라고 아버지께 부탁했다.” “창수야 고맙다”
“우리 아버지는 산에 나무하러 가시고 엄마만 온데” 우리는 마지막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이야기했다. 우리 선생님께서 말씀하신다.
“너희들 왜 안가? 빨리 식장에 가 모두가 갔어” 우리는 웃었다.
우정의 정도 시간을 초월한다는것을 느꼈다.
우리가 식장에 들어서자 모든 졸업생과 4, 5학년 후배들이 식장을 꽉 메우고 많은 학부모들도 참석하셨다.
나는 창수와 같이 자리에 않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조금후, 교장선생님의 훈시와 졸업장 수료식 및 상장식이 있었다. 6년 개근상은 전학년에 나 혼자였다.
“철아! 나가 너 이름 호명했어”
나는 천천히 걸어나갔다. 교장선생님께서 직접 부상으로 콘사이트 와 상장을 주었다.
옆에서 창수 부친이 사진을 계속 찍었다.
어머니 그리고 창수 어머니께서 박수를 쳐 주셨다. 눈가엔 눈물이 났다.
잠시후 졸업식 노래가 우리 졸업생이 선창했다. 옆에 있던 여학생 들이 울고 있다. 울음은 전파되어 강당 전체가 울음바다.

 

3년 계속 흉년으로 처음으로 적은 학생이 중학교를 진학했을 뿐 나머지는 중학교를 못갔다. 그 8명중 내 제일 친한 창수가 중학교에 가는것이 너무 좋았다. 창수에게 축하하고 축하했다.

우리 해방후 8회 졸업생중, 그때 중학교 들어간 학생중, 청와대 입지국장 이종환, 서울지검차장과 내 친우 이창수는 이민을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