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투데이 차한지 기자 | AFP통신은 급박했던 대한민국 탄핵정국을 바라보며 짧게 <새로운부조리>라는 멘트를 남겼다.
이율배반이자 아이러니이며 부조리라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꼬집은 것이다.
내일을 향해 쏴라!
국민을 향해 쏴라!
[이재명은 섬뜩한 말로 국민을 선동한다.
무안공항 사고에 부랴, 부랴 싸이트에서 삭제한다.]
미의회 도서관은 문화.역사.미술에 기여한 위대한 작품-내일을 향해쏴라!
(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 국립영화에 제정기부한다.
아카데미 촬영, 음악, 주제가 각본상을 수상하고 작품상 후보에 오른 1969미국의 서부극.
아이러니이자 부조리며 이율배반이다.
요즘 <개미 발언>이 문제다. 종족보존을 위한 투쟁을 정당화 하는 발언인 듯 한데 외신기자들 앞에서 오프드레코드(off the record) 진행속에 발언이 공개되었다.
섬뜩한 마음으로 1991년 프랑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작품 <개미>을 살펴보았다. 1993.6. 고등학교 문학교과서에 실린 <개미> 작품이다.
프랑스보다 국내에서 더 큰 인기를 보았던 작품은 200만부 출간된 뉴에지판타지 소설이다.
파브르 곤충기가 곤충의 세계를 심미안적으로 만날 수 있는 작품이였다면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는 우리에게 개미라는 인격체가 다가온 새로온 판타지아 세계로 안내했다.
명작품의 생명성을 유린하는 선동에 대하여 <새로운 부조리 입문>을 다함께 공유하기를 소망하며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글을 남긴다.
어둠은 결코 빛의 그림자 보다 어둡지 않다.
어둠이라는 거대한 그림자보다 찬란히 빛나는 빛의 그림자보다 어두울수 없다는 통렬한 정의를 피토하듯 선언했던 혼불 최명희의 시성이 그립다.
벽초 홍명희<임꺽정>, 박경리<토지> 그리고 최명희<혼불>의 명명한 문학혼의 정신이 왜 그리워 지는 것일까?
우리는 어느날 AFP언론 논평에서 대한민국의 현 상황을 <새로운 부조리>라는 명제를 선언하면서다.
이율배반, 아이러니, 부조리 문학적 사유로부터 시성으로의 이야기를 오늘의 젊은이들, 한시대의 젊음을 함께한 벗들, 뜨거운 가슴으로 대한민국호를 항해 조련, 이끌었던 선배, 그리고 첫 눈발처럼 순결한 우리의 후배, 동생들에게 대화를 남기려한다.
온전히 <새로운 부조리>에 대한 대화다.
<antinomy - 二律背反) 이율배반의 정의가 우리모두를 슬프게한다.
서로 모순되어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명제가 대한민국이 되었다.
우리모두의 인식능력에서 독립된 완결적 전체로서 받아들일수 있을 때 우리의 이성은 필연적으로 이율배반에 빠진다.
임마누엘 칸트의 정의다.
(eironeia – 위장) - 시대는 자기당착을 너머 언어적 아이러니, 상황적 아이러니, 구조적 아이러니, 에이런과 알라존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을 소환한다. 에이런(Eiron)과 알라존(Alazon)약자지만 겸손한 에이런 강자지만 자만스럽고 우둔한 알라존의 투쟁에서 에이런의 승리를 대한민국 자유헌장에 헌증하고 있다.
아이러니는 이중성 공시성의 노출이다.
기지, 풍자, 유머를 통하여 순간속에서 자아가 이중적으로 (이중성)나타나거나 분열되는 공시적 구조 (synchronic structure), 퍼소나(persona)를 제시한다.
자기당착의 이율배반 언어적, 상황적, 구조적, 아이러니는 에이런의 승리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을 소환한다.
알라존의 유희, 이재명의 독설이다.
[산정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속에 그려 보지 않으면 안된다.]
알베르토 까뮈의 시지프신화 (sisyphus).
부조리에 대한 만남이다.
부조리 코미티- 이방인의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대한민국의 자유헌장은 새로운 부조리다.
누가 큰 벌을 받아야하고 큰 죄를 지었는가?
빛의 그림자를 말하는 거지.
피를 토하는 심정이지.
요 몇일전 울산선거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뉴스를 접하고 참으로 피를 토하는 심정일세. 그 신성한 민주주의에 대한 슬픔이지.
우리모두가 민주화, 산업화를 위하여 얼마나 맹진하였고, 자부심으로 가득했나!
촛불혁명을 내 세운 집권세력이 이런 내란 범죄, 국헌문란 벌을 지었는데 이제야 법의 심판을 받는다. 이게 도대체 상식의 나라이며 법치의 국가라고 생각하는지 그것 뿐인가?
두루킹사건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까? 국민의 생각, 국민의 꿈, 국민의 의지, 국민의 자유의지를 뒤바꾸어놓은 국헌문란이요. 내란범죄 아닌가!
두루킹 사건, 울산 선거범죄는 단순한 범죄가 아님을 알수있네.
북핵 평화쑈, 부동산 통계조작, 실업률 통계조작, 사드 군사기밀 유출은 도대체 어떤 법률로 다스리고 심판받아야 옳을까?
이 모든 범죄와 죄악은 밤에 이루어진 어둠이 아니라 대낮에 이루진 빛의 그림자일세.
그 정의가 내로남불로 희화화 되었지만 이제야 몇몇 단죄가 이루어지더군 아찔하지 않은가!
여론조작을 서슴치 않은 자들이 공명정대한 공명선거를 했으리라 보는가?
그러더군.
죽은시인의 사회, 오 캡틴 나의 캡틴, 시가 떠오르는 것은 링컨 암살에 씌여진 작품이지 오히려 이상의 <날개>가 직면한 부조리, 아이러니, 이율배반의 정의가 오늘을 이해시키고 있지 않은가!
<날개>
기필코 이번 국면에는 온정성과 소명을 받치기로 했네.
평생 문화운동 현장에서 아득함, 아스라함, 모호함, 그림자 너머의 흔적을 쫓아 사금파리, 조각난 보석을 맞이하며 걸어왔기에 큰 길이나, 높은 건물, 그저 평범하기 그지없는 삶마저도 사치스럽게 만나게 되어서 외골수처럼 골목이 좋고, 골목을 따라 때로는 높은산 마저 골목 길처럼 오르고, 내려오고, 푸념처럼 배곯아 물한잔, 술한잔, 맞이하며 체온에 스민, 사람의 마음창을 이켠도 아니고, 저켠도 아니고, 그저 무심코 그 소명의 마음만은 진솔하게 읽는 힘이 생기더군.
나의 기필코는 어느분이 토하더군 (吐) 한문으로 쓰면 무슨 뜻인지 아리송하지만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라고 하면 절절함인데 그분이 오늘 생신을 맞이 했으니 경자생이고, 쥐띠다. 애증같은 골목켠을 이해함이 생기더군.
그러더니 그 분이 이러더군 뭔가를 해야지, 뭔가를 하지 못한다면 갈증이나 자기함정에 빠지는 죄책감같은 혹독함으로 말씀하더군. 맞아 피를 토하는 심정이라는 자기 토함의 일성이여서 나는 그것을 소명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네. 말하자면 그 분은 대한민국 대통령이기에 결코 사사롭지 않음을 충분히 받아들일수 있는 환경이기에-,
소명은 아마도 <날개>의 명작처럼 파라독스를 차용하는 아픔이었지, 문학천재로 일컬어지는 이상 (김혜경)은 <날개>를 통하여 현상에 대한 깊은 명제를 통렬히 제안했네. 아스피린과 수면제 사건이지.
우리모두가 알고 있듯이 아내는 손님을 맞이하는 창부였고, 이상 남편은 나르시즘의 존재자였지. 아내는 늘, 남편을 위해 아스피린을 주며, 건강을 챙겨주었는데 남편은 아스피린이 아니라 수면제임을 알게되지.
수면제를 먹고 잠을자면 의식을 잃게 되는거지. 잠을 자고 있을 때 아내는 손님을 맞이하는거지.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상은 내면의 충격과 혼란속에 독백처럼 <날개>라는 시상을 토하는 거지. 날자. 날자. 한번 날아 보자꾸나. 라는 <토함>의 울림이지.
사실 나는 이상을 국민으로 <아스피린>과 수면제를 <자유정신>으로 이상의 <날개> 문학을 해석해보기로 했네.
저분의 아픔의 공유가 결코 단순한 분노라, 절망의 문학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공유 해야할 그 무엇인가의 경건한 소명속에 이루어진 정의로 읽어봄이 어떨까 해서.
물론 <날개> 서장은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라는 문학적 사유가 듬뿍 풍기며 아직도 문학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지성사의 깊은 뿌리이지만 유독.
기필코라는 나의 다짐의 몇일을 사유하며 그 분의 소명에 <날개>를 공유하기를 권하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 육신이 흐느적 하도록 피로 했을때만 정신이 은하처럼 밝소.
니코틴이 내 회배 앓는 뱃속으로 스미면 머릿속에 으레이 백지가 준비되는 법이오. 그 위에다 나는 위트와 파라독스를 바둑 포석처럼 늘어놨소. 가증할 상식의 병이오.
<33번지 유곽>-이상의 아내가 일하던 장소.
나는 불연듯이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리 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의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내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어디 한번 이렇게 외쳐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자꾸나. 한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그리이스 신화 기술의 거장, 디이딜로스는 아들 아카루스와 미로에 같혔을 때 날개를 만들어]
<죽은시인의 사회>
도무지 풀 수 없는 숙제처럼 몇일을 보냈다. 결코 벌어지는 일들이 하나도 이해할수 없는 질문과 답이 계속된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국민께 말씀하신 내용이, 내란으로 덧쒸우더니 세상은 온통 난장판, 난장굿 놀이를 시작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굿판을 벌이는 이들의 모습은 도무지 알 수 없는 광기처럼 섬뜩하기 까지 하지만 광란굿판으로만 보기에는 아스라해 보인다. 오히려 굿판의 모든 춤사위가 무언가에 쫓겨 어쩔줄 모르는 얼빠진 이들의 초상처럼 명백함으로-,
조금 빗겨 음미하기로 했다.
지성과 감성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우리시대의 젊은이들에게 화두를 찾기로 했다.
<날개>, <죽은시인의 사회>, <혼불>, <단테의 신곡>처럼 무언가를 사유하는 질문과 답이다.
참이상하지 골목, 광장은 분명히 다르지만 같은것인데.
골목여행을 하다 부숴지고, 비좁고, 어두울지라도 포근하고 아득하며 때로는 멋진 새소리와 댕댕이 꼬리침도 만나지만.
어느덧 옛 추억의 술래잡기 나무 전봇대도 만나 인사동, 대학로, 홍대, 을지로, 성수동, 구로동, 고즈넉한 맛에 취하지만 빛나는 네온싸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힘찬 고층빌딩 숲속에 활기넘친 삶과 역동성, 품격과 풍요가 가득하고, 온 세상의 멋짐을 듬뿍 담아낸 세련되고 압도적인 풍요와 파라독스가 꽃피지만 골목과 광장의 만남과 화해는 섭리지.
참이상하지, 광장은 어찌하여 골목을 두려워 하거나 골목은 왜 광장으로 부터벗어나려는 것일까?
어둠은 결코 빛의 그림자 보다 어둡지 않다. 질경이 꽃망울처럼 꽃피다 홀연히 떠난 여류작가의 토함같아서 말일세. 그럼에도 골목여행은 치유와 환원이 끝나는 지점이라는 것이 목도일세. 40여년 걸어온 발자국 같은 맞침표지.
아는가? 청와대 용산 국민품으로가 얼마나 지대하며 숭고한 명령어인지.
안타까운 명제지만 단테의 <신곡>처럼, 우리의 존재를 이해하는 단초가 시작되었음을, 경자생 대통령이 매듭을 풀었음에도 그 큰 그림을 읽을, 국민의 민도가 뒷받침이 안되니 말일세.
코리아 둘레길4,500km, 완성과 함께 박근혜 대통령의 염원이 윤석열 대통령과 만나는 시점 – 청와대 용산 국민품으로 보물지도가 시대명제로 시작 될즈음 해서 변고라면 변고요. 큰 변란이 오늘이네. 어찌되었든 산길, 물길, 문화, 문명, 사람의 길이 금수강산에 드리워지고 다물사상의 물결을 곧 맞이 하겠지만 문화.문명 운동 차원에서의 디딤돌이라고 사유하네.
오히려 죽은시인의 사회, 오 캡틴 나의 캡틴 - <카프페디엠>의 고유가 떠오르는 것은 무슨 일일까!
선장의 의무와 책무는 생명이다.
타이타닉호의 선장이 배와 함께 수장된 것은 이를 잘 보여주는 의무와 책무 신성함이다.
광장과 골목을 만나게하려는 소명 어둠은 결코 빛의 그림자보다 어둡지 않다는 토함의 절규를!
우리모두에게 시대명제로 부여했다.
결국 죽은시인의 사회 키팅은 파면을 당하였다. 그럼에도 키팅이 결코 우리곁을 떠나지 않음은 <사춘기 괴물>들에게 <사춘기>를 품고 시를 써야하는 <자유>를 선사했다.
카르페디엠- 오늘에 대한 자유다.
오 캡틴 나의 캡틴.
우리의 두려운 여정은 끝났습니다.
배는 모든 폭풍을 이겨냈고 우리가 찾던 상은 거머 쥐었습니다.
하지만 오 가슴이여! 가슴이여!
오 붉은피, 방울들 갑판위에 누운 나의 캡틴이 차갑게 쓰러져 죽었습니다.
배는 안전하고 온전하게 닻을 내리고 향해는 끝났습니다.
두려운 여정을 마친 승리의 배가 목적을 이루고 항구에 들어옵니다.
기뻐하라. 오 해안들이여 종을 울려라. 하지만 나는 애통한 발걸음으로 갑판위를 걷습니다. 나의 캡틴이 누워 있습니다. 차갑게 죽은채로.
<혼불>
어둠은 늘 자랑한다. 악의 상징이요. 슬픔, 배신, 헤어짐, 파괴의 으뜸이라고 어두운 그림자는 음모와 흉계를 꾸미며 선함에 대하여 조롱한다.
우리의 어둠은 결코 모든 정의로부터 자유롭고 지배함을.
어둠은 빛의 그림자를 모른다. 빛은 밝고 정의로우며 모두에게 당당히 소리치며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음을 그럼에도 빛에도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결코 어둠의 그림자는 빛의 그림자보다 어두울수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통령은 취임식에 선언하였다. 반지성주의와의 전쟁을.
반지성주의는 독이든 설탕이다. 극단주의, 팬덤주의, 네오막시즘, 줄곧 오늘에 대한 투쟁을 독려했다. 새로운 부조리의 독백이었다.
오! 캡틴 나의 캡틴!!! 2025.1.13. 박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