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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기고] 레고랜드 사태를 ‘중도 되살리기’로 혈세낭비를 혈세활용으로 — 이미 특별한 곳을 자랑하자!

자유기고가 황지영

 

춘천 가는 기차를 타고 간다. 춘천역에 내리면 멀리 풍경이 보이고, 강위에 섬 하나가 떠 있다.

도시 속의 섬. 그것만으로도 멋지다.

북한강과 소양강이 만나는 곳, 춘천 중도다.

 

레고랜드 사업을 추진하면서 춘천대교가 놓였다. 문화유산을 지켜야 한다며 시민들은 천막을 치고 현장을 지켰고 공사를 막으려 했다. 격렬한 갈등 끝에 결국 다리는 놓였다.

생각해보면 다리에 무슨 잘못이 있을까.

 

다리는 유적을 모르고, 목적지를 선택하지 않는다. 사람이 선택한다.

레고랜드를 찾아 건너면 놀이공원으로 가는 다리이고, 중도유적을 찾아 건너면 수천 년의 역사로 들어가는 다리다.

 

길은 그대로인데 목적지는 바꿀 수 있다.

레고랜드 사태로 상처 입은 춘천과 강원도를 되살릴 해법도 어쩌면 바로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중도를 버리고 중도가 아닌 것으로 승부하려 했던 정책에서, 다시 중도 자체의 가치로 돌아가는 것이다.

 

중도는 무엇을 가져다 놓아야 특별해지는 곳이 아니다.

중도는 이미 특별하다.

 

수천억이 들어갔는데, 이제 와서 어떻게 하느냐고?

그래서 제대로 바르게 쓰자는 것이다.

 

레고랜드 사업 과정에서 막대한 공공재정이 투입됐다. 춘천대교가 놓였고 도로와 주차장, 산책로와 자전거길이 만들어졌다.

이미 쓴 경비는 되돌릴 수 없다.

책임질 일이 있다면 책임도 물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낼 수는 없다.

 

 

이제는 한 가지를 더 물어야 한다.

 

“이미 만들어 놓은 것을 어떻게 살려 쓸 것인가?”

 

춘천대교는 대한민국의 역사로 들어가는 관문이 될 수 있다. 도로는 자연생태·역사문화 탐방길이 되고, 자전거길은 의암호 생태길이 된다. 이미 만들어진 기반시설은 학생과 가족, 연구자와 국내외 여행객이 중도를 찾아오는 길이 된다.

실패한 개발의 인프라를 보존과 활용의 인프라로 전환하는 것이다.

 

혈세낭비를 혈세활용으로.

레고랜드 사태를 중도 되살리기로 바꾸는 첫 번째 전환이다.

 

건물 하나가 아니라 상·하중도 전체가 박물관이다

중도에 박물관 하나를 짓는 것으로 생각을 가둘 필요도 없다.

중도는 석기부터 철기까지 첩첩히 역사가 쌓여져있는 대한민국 최대의 유적지다.

중도의 스케일과 규모를 살려내려면 답이 달라진다. 문화강국 대한민국의 위상을 보이려면 눈이 달라진다.

 

 

상중도와 하중도 전체가 하나의 ‘지붕 없는 살아 있는 박물관’이다.

그러면 호수공원의 크기와 수준도 달라진다.

 

꽃을 심고 예쁘게 꾸며 걷는 공원에 머무르지 않는다. 습지에서는 물과 흙, 식물과 곤충, 새와 물고기가 서로 관계를 맺으며 생물다양성을 이루어가는 과정을 관찰한다.

자연을 설명판에서 읽는 것이 아니다.

자연 그 자체가 교과서다.

 

상ㆍ하중도의 귀중한 습지생태를 보전해 람사르습지로 등록하고, 중도와 의암호의 생태환경을 세계적인 자연생태 공간으로 키워간다면 호수공원의 격은 완전히 달라진다.

 

그리고 그곳에서 조금만 시선을 돌리면 또 다른 시간이 나타난다.

 

북한강과 소양강이 만난다.

물이 만나 땅을 만들고, 사람이 물가에 정착한다. 집을 짓고 농사를 짓는다.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만들고 공동체를 이룬다.

 

고산을 바라보며 아이들이 묻는다.

“옛날 사람들은 왜 이곳에 모여 살았을까?”

강에서 땅으로, 땅에서 농경으로, 농경에서 마을로, 마을에서 공동체와 문명으로.

교과서 한 페이지에서 읽었던 문명의 발생을 실제 그 공간을 걸으며 생각한다.

 

중도는 이미 살아 있는 역사교과서다.

 

수천 년 전 밭에서 미래 바이오농업까지

중도의 농경 흔적은 또 하나의 시간축이 된다.

그물망처럼 펼쳐졌던 옛 구획밭에서 출발해 선사 농경과 전통농업을 지나 현대 시설농업, 미래 바이오농업까지 한 공간에서 펼쳐진다.

 

그 가운데 꼬마농장이 있다.

꼬마농부들이 흙을 만지고 씨앗을 심는다. 물을 주고 꽃이 피기를 기다린다. 벌과 나비가 찾아오는 것을 보고, 비와 햇빛에 따라 식물이 달라지는 것을 경험한다.

그 과정에서 흙과 물과 햇빛, 식물과 곤충, 사람과 기후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몸으로 알아간다.

기후와 우주, 생명과 인간의 관계까지 생각해볼 수 있다.

홍익인간과 재세이화도 외우는 문장에서 살아 있는 질문으로 바뀐다.

나만 잘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잘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과 자연을 함께 이롭게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역사와 생태, 농업과 기후, 철학과 미래교육이 한곳에서 만난다.

 

 

중도에 들어서는 순간 타임머신이 출발한다

중도에서는 이동조차 콘텐츠가 된다.

수천년 흘려내려온 유기물이 쌓어 비옥한 흙으로 쌓은 중도흙길을 맨발로 걸어본다. 달린다. 고증을 거쳐 복원한 고조선 수레를 타본다. 자전거를 탄다. 물길을 이용했던 이동방식을 경험하고 현대의 친환경 교통에서 미래 모빌리티까지 만난다.

 

두 발에서 수레로, 물길에서 자전거로, 현대교통에서 미래 모빌리티로.

인류가 어떻게 움직여왔는지를 몸으로 경험한다.

아이에게는 놀이이고 학생에게는 수업이며 어른에게는 여행이다.

 

 

섬 전체가 타임머신이다.

원본은 지키고, 보이지 않는 시간은 첨단기술로 깨운다

살아 있는 박물관이라고 해서 옛 마을을 상상으로 만들어 세울 필요는 없다.

원본은 원본대로 지킨다.

원위치·원형 보존이 가능한 유적은 그대로 보존하고 자연도 살린다. 당장 발굴할 필요가 없는 유적은 미래세대가 더 발전한 기술로 연구할 수 있도록 땅속에 남겨둔다.

 

대신 보이지 않는 시간은 대한민국이 잘하는 기술로 보여준다.

AI와 AR·VR, 3D 스캔, 레이저, 디지털 트윈을 활용한다.

지금은 풀밭인 곳에 기기를 비추면 수천 년 전 마을이 일어난다. 집이 나타나고 사람들이 밭을 간다. 수레가 지나가고 아이들이 뛰어논다.

그러면서도 진짜 유적은 땅속에서 안전하게 보존된다.

 

 

첨단산업을 위해 유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유적을 지키고 되살려 보여주기 위해 첨단산업을 사용한다.

 

과거와 미래가 중도에서 만난다.

 

대한민국 세계 예술문화인이 중도로 찾아온다

거기에 예술이 들어오면 중도는 더 놀라워진다.

 

고고학자의 발굴성과에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진다. 고인돌 하나에서 한 가족의 이야기가 태어나고, 집터 하나에서 수천 년 전 어느 아이의 하루가 펼쳐진다.

 

음악가는 중도의 소리를 만들고 무용가는 몸으로 시간을 표현한다. 마임니스터ㆍ배우와 영화인, 화가와 조각가, 애니메이터와 미디어 예술가가 저마다 중도를 해석한다.

 

낮에는 실제 유적과 자연을 걷고, 밤에는 자연을 소중히 지키면서 음악과 춤, 연극과 미디어아트를 만난다.

 

역사는 이야기를 낳고,

자연은 영감을 낳고,

영감은 예술을 낳고,

예술은 콘텐츠가 된다.

 

대한민국의 예술문화인이 중도를 찾아오고, 그들이 만든 콘텐츠를 보기 위해 세계 사람들이 춘천을 찾아온다.

 

보존이 경제를 막는 것이 아니다.

 

보존이 콘텐츠를 만들고 콘텐츠가 사람을 부르며 사람이 머물면 춘천의 경제가 살아난다.

 

 

하루 더 머물고 싶고, 아예 살고 싶은 춘천

오늘은 상·하중도의 역사길을 걷고 내일은 생태길을 간다.

봄에는 꽃과 새를 만나고 여름에는 습지를 탐사한다. 가을에는 농경을 체험하고 겨울에는 AI를 통해 땅속의 역사를 여행한다.

 

아이였을 때 왔다가 청년이 되어 다시 온다. 그길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 이곳에서 정착해 살기도 좋댜. 세월이 흘러 자기 아이의 손을 잡고 또 찾아온다.

 

박물관이 늙지 않는다.

 

계절이 바뀌고 자연이 변한다. 새로운 발굴과 연구성과가 더해지고 기술과 예술이 발전할 때마다 새로운 이야기가 태어난다.

 

그래서 살아 있는 박물관이다.

 

관광객이 몇 시간 구경하고 떠나는 도시가 아니라 더 머물고 싶고, 다시 오고 싶고, 나아가 살고 싶은 춘천으로 바뀐다.

 

2025년 금강산에서 춘천 중도를 바라본다

2025년 금강산은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이 됐다.

그리고 중도에는 금강산에서 떠내려왔다는 전설을 간직한 부래산이 있다.

금강산에서 춘천 중도까지.

그 길을 자연과 역사문화의 새로운 축으로 상상해볼 수 있다.

남과 북의 고고학자와 생태학자, 역사학자와 지질학자가 만나고 청소년과 예술가가 오간다. 학술교류가 자연과 역사문화 교류로, 다시 관광과 평화의 교류로 이어진다.

 

중도의 습지는 람사르습지로, 의암호와 중도의 자연생태는 세계적인 보전지역으로 성장하고, 서면·중도·우두로 이어지는 역사문화권은 체계적인 조사와 연구를 거쳐 세계에 내놓는다.

 

그렇게 자연과 문화의 가치를 하나씩 증명해간다면 세계문화유산과 세계자연유산이 되며 세계복합유산의 꿈까지 이어질 수 있다.

 

중도는 변방의 섬이 아니라 남북의 자연·역사·학술·예술·관광을 잇는 중심이 된다.

 

이미 특별한 곳을 자랑하면 된다

해외의 유명한 역사도시와 자연유산을 돌아보고 나면 오히려 우리 것이 보일 때가 있다.

“우리 것도 참 좋은데.”

우리가 가진 것이 부족했던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이미 가진 것을 알아보는 눈, 잘 지키는 지혜, 그리고 그것을 세계에 보여주는 창의력을 발휘 하면된다.

 

외국에서 성공한 관광지를 또 가져올 필요가 없다.

외국에 이미 있는 정원을 닮게 만들 이유도 없다.

놀이공원도 정원도 세계 어디에서든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북한강과 소양강이 만나는 도시 속의 섬, 섬속에 연못이 있는 희기한 터, 그 터에 켜켜이 쌓인 자연과 수천 년의 역사는 어디에서도 사올 수 없다.

 

원본은 중도에 있다.

 

레고랜드 사태를 중도 되살리기로

레고랜드 사태의 책임을 규명하는 것과 춘천의 미래를 만드는 것은 함께 가야 한다.

 

실패 다음의 정책이 있어야 한다.

춘천대교를 레고랜드를 당장 뜯자는 것이 아니다. 이미 만든 것은 활용한다. 언젠가 유적과 경관을 더 온전히 회복할 방법이 필요하다면 그때 다시 검토하면 된다.

 

어쩌면 섬은 배를 타고 들어갈 때 더 낭만적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다리가 아니다.

 

어디로 가느냐이다.

상·하중도 전체를 지붕 없는 살아 있는 자연생태ㆍ역사문화 박물관으로 만든다.

자연생태와 역사문화, 농업과 교육, 예술과 콘텐츠, 관광과 AI·첨단산업이 한 섬에서 만난다.

 

강은 자연사 전시실이 되고 습지는 생명교과서가 된다. 구획밭은 농업사 교실이 되고 흙길은 시간여행길이 된다. 고인돌과 집터는 역사책의 원본이고 AI는 땅속의 시간을 보여준다. 예술은 그 시간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새로운 것을 가져다 놓아 중도를 특별하게 만들 필요가 없었다.

 

 

중도는 이미 특별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특별함을 알아보고, 원형을 지키고, 연구하고, 연결하고, 거기에 대한민국의 창의력을 더해 세계에 자랑하는 것이다.

 

레고랜드 사태를 중도 되살리기로.

혈세낭비를 혈세활용으로.

외국 것을 가져오는 관광에서 우리의 원본을 세계가 찾아오는 관광으로.

 

춘천역에서 다리 하나를 건너면 시작된다.

도시 속의 섬.

북한강과 소양강이 만나는 곳.

수천 년의 역사와 자연, 오늘의 예술과 미래의 첨단산업이 함께 살아가는 곳.

춘천 중도.

 

우리는 소중한 보물을 두고, 딴도시 딴나라를 부러워했을지 모른다. 이미 그자리에 보물이 있었는데... 이제 그 보물의 원석을 광채를 내어 보여주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