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투데이 이승일 기자 | 최근 개장한 강화기독교역사기념관 1,2층 전시관에서 '이동휘 선생 기념사업회 이전 현판식 및 기념전시실 개소식'이 4월 16일 오후 3시에 개최된다고 하는데 이동휘 선생의 과거 행적에 대한 논란이 불거질 전망이다.
이동휘 선생은 1873년 現 함경남도 단천시 출신 인물로 하빈 이씨이며, 대한제국의 군인감리회 신자이며, 한국의 독립운동가로 알려져 있다. 임시정부 계열 독립운동가이며, 1935년 소련 프리모리예 지방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사망했으며 묘소는 러시아 프리모리예 지방 블라디보스토크 페르바야 레츠카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반을 거쳤다.
이동휘 선생은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자 공산주의자로 전향하여 볼셰비키에 가입했으며 1918년 볼셰비키에서 지원을 받아 한인 최초이자 아시아 최초의 볼셰비키 당인 한인사회당을 창당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으나 다른 요인들과의 의견 대립으로 탈퇴했으며 고려공산당을 창당한 후 남은 생애의 대부분을 경도된 공산주의 활동에 투신했다.
특히 그는 한인사회당을 재건한 뒤 임시정부를 주도하는 정당으로 삼음으로써 임시정부를 친 소련 성향의 '고려혁명위원회'로 개편하려 했다.
그러나 이는 임시정부 내의 다수 민족주의 인사들의 극렬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이동휘는 개인적으로 김구와 만나 조선에도 소련처럼 공산 혁명이 필요하니 협조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김구에게 거부당했다고 한다. 특히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추대된 이승만과의 갈등은 임시정부의 운영에 장애가 될 정도로 심각했다.
이후 이승만, 이동녕, 이시영, 신규식, 안창호 등 우파 인사들의 거센 비난을 받게 되자, 이동휘는 결국 1921년 1월 국무총리 직을 사임한 뒤 임시정부를 탈퇴했다. 이후 그는 상해파 고려공산당 창당에 나섰다.
이동휘 선생은 1935년 1월 31일 오후 7시 끝내 회생하지 못하고 향년 62세로 숨을 거두면서 유언을 남겼는데 "나는 조선의 혁명이 성공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소. 동무들은 반드시 고려소비에트공화국을 성립하시오"라고 했다고 한다.
강화군에서 학교 등을 세운 이력 등도 있지만, '보수'를 주장하는 강화군에서 최초의 한인 공산주의자인 '알렉산드라 김'에 이어 2번째로 공산주의자가 된 인물로 알려져 있는 이동휘 선생 기념사업회 이전 현판식 등을 개최하는 것은 현 시국에서는 맞지 않는 분위기이다.
또한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소련에 대한 반감이 심한 현재의 관계관계속에서 '고려소비에트공화국'을 만들라고 유언을 한 이동휘 선생을 기리는 행사를 한다는 점은 더더욱 논란의 대상이 될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