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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집념으로 가치를 더하다.

억척스런 집념으로 국가유물 조선황실 복원 전문가 박현주 원장

우리투데이 차한지 기자 |  문화유산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집념으로 더해진 생각이 문화재 복원으로  가치를 더하는 이시대 문화재 복원에 정성을 다하는 박현주 원장의 길을 거슬러본다.

 

지난 2005년 강원도 양양 낙산사 산불화재는 충격적이었다. 실시간 생중계로 송출되는 장면은 그야말로 혼이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이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 2008년 국보 1호인 남대문이 방화로 전소되면서 문화재 손실이 심각한 문제로 재기되었다. 이에 따라 2009년 2월 대통령령으로 국보 또는 보물로 지정된 목조건축물과 이에 포함된 일체의 기물들에 소방방재 시설이 강화되었다.

 

화재에 취약한 섬유문화재, 종묘 면장을 방염처리하다.

 

 

종묘는 동아시아에서 유교문화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건축물로 1999년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009년에 조선 왕릉 40기가 추가되면서 문화재청에서는 2014년까지 6년간 311개 활용사업을 추진하면서 문화유산 공간 내부 기물들을 하나씩 복제, 재현하는 사업을 전개해 나갔다. 먼저 문화재로 등록된 종묘(사적 제125호) 정전(국보 제227호)과 영녕전(보물 제821호) 내부 공간에 설치된 면장(面帳)에 소방방재 방법을 적용하기로 하였다.

 

 

종묘와 영녕전에는 83위의 선왕과 선후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내부 공간에는 제향과 제례를 위한 일체의 제기구와 의물들이 설치되어 있다. 이러한 기물들은 대다수가 목재와 철재와 섬유로 제작되어 훼손의 상태가 심각했으며 화재에 취약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역대 선왕의 신주를 모시고 국가 제례를 거행하는 성서러운 영역에 드리워진 면장에 최우선적으로 화재에 대한 방재, 방염처리를 시행했다.

 

 

 

1395년(태조 4)에 건립된 종묘는 신주를 모시고 있는 신실 공간과 의식을 거행하는 제례 공간으로 구분되어 있다. 그 후 증축과 소실, 재건과정을 거치면서 신실은 정전 19실과 영녕전 16실로 총 35실로 구성되었다. 특히 화재에 취약한 의물로는 섬유로 만들어진 포진제구에 집중된다. 신주를 외부와 단절하고, 보호하기 위한 기능을 가진 면장과 주렴과 욕석이 있다. 면장은 신실을 구분하고 분리하기 위한 휘장이다. 천으로 가림막을 하여 각각의 신실이 독립된 공간의 역할을 하고 있다.

 

신실 면장에는 신주장에 신주를 보호하고 있는 <내면장>과 신탑, 신주교의, 답장을 보호하고 있는 <중면장>과 신실 공간과 제례 공간을 구분하는 <외면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록에 의하면 홍주(紅紬)나 홍초(紅綃)를 사용한다고 하나, 현상 유물은 명주로 제작되어 있었다. 먼저, 현상 유물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실측과 촬영, 그리고 시료 분석을 선행했다. 유물 실태조사는 본사 연구팀에서 진행하고, 섬유 분석과 시직은 한국실크연구원에서 진행했다. 현장 조사 과정에 정전 18실인 고종황제의 신실 책장 위에 대한제국기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지는 중면장 한점이 방치되어 있어 유물 분석 시료로 사용하였다. 펼쳐서 가장 훼손이나 탈색이 덜 진행된 시접 부분을 체취하여 분석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홍색 비단으로 진설되었던 면장은 1897년 대한제국 황의례에 의해 황의장으로 교체하는 규정에 따라 시행된 것으로 1909년 황색 비단으로 교체된 것으로 짐작된다. 대한민국 건립 이후 1962년 문화공보부에서 일제히 정비된 것과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 연간에 또 한차례 더 교체되었다. 그리고 2009년 면장에 방염처리를 해서 새롭게 재정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창덕궁 인정전 황금색으로 물들이다 

 

인정전(국보 제225호)은 1405년(태종 5)에 건립된 창덕궁(사적 제122호)의 정전이다. 조선 시대 국왕이 집무를 보던 편전으로 사용되었으며, 대한제국기에 고종의 즉위식까지 8명의 왕의 즉위식을 비롯하여 국가의 주요 의식이 거행되었던 곳이다. 1926년에 찍은 인정전의 커튼은 흑백 원판사진으로 보아도 화려함을 짐작하기에 충분하였다. 당시 근대식 건축양식이 도입되고, 궁궐 내부 실내 장식에 서양식 의장이 도입되면서 궁전 내부에 거대한 천정유리갓 등과 트리밍 술과 봉술매듭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바란스와 십장생 금직 문양으로 제직된 커튼이 인정전 사방 창문을 병풍처럼 휘감아 둘러쳐져 있었다. 정전 북쪽 상단에 위치한 어탁 위 장엄에도 같은 디자인의 바란스가 설치되어 있다.

 

 

커튼은 이미 철거되어 궁중유물전시관 수장고에서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전되어 있었다. 2009년 시행한《궁궐생활상 재현용품 확충사업》의 <창덕궁 인정전 재현용품 연구> 사전 학술조사 자료를 근거로 하여 커튼 복제사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다행하게도 이 사업에는 근거 유물이 잔존해 있어서 충분한 조사와 분석으로 실재에 가깝게 접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산업시스템은 이미 현대화 기기와 방식으로 판도가 달라져 있었고, 재료와 가공방식도 달라졌다. 늘 그렇듯이 한정된 조건 안에서 최대한 근접하게 만들어야 했다. 초기에는 시간과의 싸움이 더 치열했다. 직물은 분석 결과 인견으로 조사되어 국내 제직이 가능한 것이여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행히 사전 학술용역에 참여한 실크연구원에서 원사구입 및 직물제직과 방염가공에 참여하게 되어 분업해서 사업을 전개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문직기술자도 고궁박물관에서 복원사업으로 시행한 조선왕실 왕비 적의 원단을 직조한 자가 참여할 수 있어 최상의 팀으로 사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최종적으로 총괄 제작을 담당한 우리 회사는 그야말로 박제 유물에 수혈을 해야 했다. 색을 입히고, 자르고 꿰매서 장식을 달고 이를 바탕으로 유물에 근접하게 이루어내야 했다.

 

 

유물이 서양식 커튼으로 제작된 것이어서 바란스의 봉술이나 커튼을 묶는 끈인 타이백은 국내 제작이 불가능했다. 이미 세계의 커튼 생산지는 중국의 대련과 위혜에 집중되어 있었다. 국내 커튼 트리밍 전문회사의 중국 공장이 단동에 있어서 인천에서 배를 타고 대련으로 가서 위혜를 거쳐 단동까지 행보를 빠르게 전개해야 했다. 창문 하나에 커튼 규격이 7.5m x 5m이고,상단에 설치된 바란스의 크기도 9m x 1.5m로 무게가 엄청났다. 특히 인견(레이온)은 섬유의 비중이 높다. 사방에 있는 18개의 창문에 완성된 커튼을 설치하기 위하여 7m의 비계를 조립하고 8명의 인부가 투입되었다. 이렇게 오늘날 창덕궁 인정전에 황금색 커튼이 드리워지면서 과거에 음침했던 인정전 실내가 화려하고 웅장해졌다. 그야말로 대한제국 황제의 존엄이 고색창연한 전정에 도열한 품계석과 더불어 되살아나는 듯하였다.

 

덕수궁, 석조전 커튼과 참장으로 옷을 입히다.

 

 

덕수궁(사적 124호)을 보면 가슴이 시리다. 구한말 격동기를 고스란히 겪어냈던 조선의 궁궐 중에 애잔한 사연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사저였던 이곳은 정릉동 행궁, 경운궁,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수많은 역사적 사연을 품고 있다. 조선 말기에 아관파천으로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겨갔던 고종이 이곳으로 돌아오면서 궁내에 진전인 선원전과 정전인 중화전을 비롯하여 전관헌과 돈덕전 등 서양식 건물을 다수 지었다. 석조전도 이 당시에 지어졌다. 1897년부터 1919년까지 왕실의 비사와 더불어 패망해가는 일련의 사건들과 함께 했던 석조전에 커튼을 설치하게 되었다.

석조전은 1904년에 영국 회사가 설계하고 착공하여 1910년에 완공되었다. 당시 설계도면을 기본으로 하고, 영친왕 부부 관련 흑백 원판사진과 당시 궁궐 연회 기사와 사진 등 자료를 고증의 기초로 삼았다.

 

 

석조전 커튼은 크게 세 파트로 나누었다. 고종과 순종 내외가 주로 거처하였던 사적인 공간과 대외적인 집무를 수행했던 공적 장소를 나누고, 공용 복도와 출입문 창으로 구분하고 장소에 따라 디자인 패턴을 다르게 진행했다. 흑백 원판 사진을 최대한 확대하여 직물의 문양과 장식 패턴을 복제하고, 장소에 따라 건물 외곽 사진에 투영된 레이스 커튼의 패턴을 추적하여 도면화했다. 때에 따라서는 사진 거울에 투사된 건너편 실내 커턴의 바란스 디자인을 도식화하기도 했다. 패턴과 도면 작업, 직물 문양과 소재, 색상 선정, 각종 장식과 부자재 등에 대한 회의를 거치고, 시제품 제작과 검수 후 복제품 제작 등으로 이어지는 작업 과정은 결코 녹녹치 않았다. 100년 전 흑백 사진 속에 있는 사물을 복사해야 했다. 영화, 연극무대의 미술 장면을 연출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와 거의 흡사한 실물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어쩌면 가장 큰 걸림돌이었을 만큼 자문에, 감수를 반복해야 했다.

 

 

 

현재 커튼시장에는 당시의 제품을 재현하거나 복제할 아무런 기술과 장치가 남아있지 않았다. 이미 세계의 모든 제품의 생산을 위한 공장은 중국으로 집중되어 대한민국 어디에도 이것을 제작할 곳이 없었다. 우리 일은 직접 짜야했고, 직접 만들어야 하는데 전국에 있는 몇몇 한복지 생산 공장을 알아보고, 커튼 제직공장도 알아보았으나 모두 고개만 절래절래 흔들 뿐이었다. 결국 막대한 재고를 감수하고 공주와 대구로 나누어 기본량을 발주해야만 했다.

 

 

 

그 다음 작업인 레이스 커튼 제작은 산너머 산이었다. 근대 서양식 건축물의 창문에는 바젠버그방식의 커튼을 많이 사용했다. 이는 르네상스 시대 종교 의례용 예복과 수건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든 수공예물로 스페인과 프랑스 남부 한 두곳을 제외하고는 중국 대련에서 생산하고 있었다. 이 역시 우여곡절 끝에 레이스를 짜서 이어붙이는 방법으로 복제물을 만들 수 있었다. 여기에 고종과 순종의 가족들이 거처했던 침실 침장류도 함께 제작하였다.

 

 

 

개관에 앞서 발표된 영상들을 보면서 저 일을 어떻게 해냈는지 과정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개관식을 몇일 앞두고 최종 점검을 위해 각 실마다 다니면서 커튼의 실루엣을 살펴가면서 매무새를 잡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년이 지나가고 있다. 커튼과 침장류는 생활소비재로 세탁과 다리미질과 같은 손길이 끊임없이 요구되는 제품이다. 한번 만들어놓으면 천년이 가는 유물이 아니어서 다 만들어서 걸어놓고 나면 뿌듯함보다 또 다른 과제로 남겨놓은 느낌이다.

 

정조의 외방진전, 화령전에 불을 밝히다.

 

화성은 정조의 걸작이다. 이렇게 축조된 화성행궁(사적 제478호)에는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고 있는 진전이 있다. 화령전(사적 제112호)이다. 화령전에는 정조의 어진을 모시고 봉심하는 어진봉안각인 운한각(보물 제2035호)이 있다. 이 곳은 정조의 탄신일과 납향일(臘享日)에 제향 의식을 거행한 정전이다.

화령전은 수원의 옛 지명인 화성에서 화자를 따고, 시경에서 딴‘령’(돌아가 부모에게 문안하리라)을 합성하여 지은 이름이다. 정조는 특히 효를 몸소 실천한 임금이었다. 부친인 사도세자와 해경궁 홍씨에 대한 효행과 그리움에 관한 많은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운한각은 창덕궁 정자각 주합루에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였던 전각과 현판명이 같다.‘운한(雲漢)’은 은하수라는 뜻으로 임금이 가뭄을 걱정하여 하늘에 기우제를 올릴 때 불렸다는『시경(대아 탕지십)』의 시구에서 따왔고 한다.

 

 

 

화령전은 1801년(순조 1)에 건립되어 1920년 고종 대에 어진을 창덕궁으로 옮겨지면서 화령전의 제향은 중지되었다. 이후부터 화령전에 대한 정부의 관리소홀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더욱 피폐해지고 운한각 내부에 설치된 모든 의례용품은 흔적조차 없어졌다.

2015년에는 수원 화성행궁에 있는 정조대왕의 어진을 모시고 있는 화령전 내 전시물을 정비하고, 2016년에는 운한각 내부 의물을 개비하였다. 고증을 위한 자료로는 어진봉안처에 대한 운영과 규정에 대한 선행연구와 물품에 대해 기록해 놓은 『화령전응행절목』을 근거로 하여 복원작업을 수행하였다. 운한각 내부 의물은 2004년에 시행한 복원 사업으로 일부 의물이 교체되기는 하였으나 연구가 미비하고, 제작방식이 조악하여 심도있는 고증자료와 자문을 토대로 소재와 제작방식을 원형에 충실한 방향으로 진행하였다.

운한각은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고 있는 진전 형태의 궁궐 건축의 내부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궁궐 전각 가운데 진전은 왕의 어진을 모시는 것을 생전에 국왕의 침전과 같이 꾸미도록 하였던 만큼 내부에는 북벽 가운데 낮은 내합 바닥에 별문지의와 용문석을 깔고 그 위에 용평산을 배치하고 다시 채화문석을 깔았다. 모란병푼과 일월병풍을 배설하고 어진을 용평산 위에 드리웠다. 홍색의 갑사장과 강사장을 치고 내합에는 네짝의 분합문이 설치되어 있다. 분합문 위에는 주렴이 설치된 흔적으로 오리목이 설치되어 있었다. 제례공간에는 좌우로 산, 선, 개와 수정장, 금은월도가 함께 삽기되어 있고, 신여가 함께 진설되어 있었다.

의장물 가운데 주렴과 용상과 의장은 주재료가 목재와 도료이고, 휘장과 욕석은 섬유류와 초고류를 사용하고 있어 분야별 전문가의 참여로 상호 공조하여야 완성도를 높일 수 있었다.

주렴은 겨울대를 사용해야 해서 국내 죽가공조합에 의뢰하여 매입하였다. 규격과 소재는 본사에서 직접 도식화해서 구매하고 가공한 후 죽렴장과 공조하였다. 발짜는 장인을 렴장(簾匠)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두 명이 있다. 용상은 2004년 의물복원사업에 참여하여 소목의장물을 제작했던 가마장(우수숙련기술인)이 담당하였다. 우리 회사는 감실에 봉안되어 있는 어진을 보호하고 외기와 분리하기 위해 설치된 갑사장과 강사장, 내합 바닥에 깔린 용문석과 별문지의를 비롯하여 의장을 제작하는 것으로 분업하였다.

이번 화령전 의물 정비는 건립 당시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기로 하면서 홍색으로 감실 면장과 산과 개의 휘장을 황색에서 홍색으로 바꾸었다. 빠듯한 일정에 복원 의물의 가지 수가 많아 발품을 많이 팔고서야 사업을 마칠 수 있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의물들을 제자리에 배치하는 작업은 이른 새벽부터 시작해도 항상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린 늦은 밤이 되어야 끝났다. 운한각에 불이 환하게 밝혀지자 새롭게 단장한 홍색 면장에 휘감긴 정조 어진의 전경이 정조대왕에게 신방을 꾸며준 것 같은 뿌듯함에 젖어 돌아나오는 내내 흐뭇했다.

 

전통을 고부가 가치로 재창출하는 《비단쟁이 칸(Artisan Khan》....

 

㈜한웨이브리미티드는 전통복식과 전통생활양식을 주 아이템으로 고증, 제작, 판매하는 회사이다. 학부 졸업하면서부터 지속해 온 전통복식 관련 일은 전통 섬유를 소재로 만들어진 유물을 정비하는 일로 이어졌다. 현대화가 가속되는 미디어 복합시대에 그동안 전근대적인 방식으로 운영해 온 한복업계에 비젼을 제시할 목적으로 한복 전문회사를 설립하였다. 한복과 문화재 사업이 무슨 연관이 있을까 궁금하겠지만 유형의 문화재를 구성하고 있는 소재 중에 직물로 만들어진 유물이 많다. 특히 과거 생활소비재에는 일상의 생활양식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것으로 다양한 소재가 복합적으로 어우러져서 만들어진다.

 

 

최근 전통문화유산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높아가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숫자가 많아지면서 문화유산의 ‘보존’에서 ‘활용’으로 변화되고 있다. 특히 문화유산을 향유하는 국내외의 관광이 보편화되면서 이에 대한 실용적 가치가 절실해지고 있다. 창업 당시부터 전통을 활용하기 위해 시작된 일이 박제된 공간에서 벗어나 품격있는 활용으로 자원을 가치화하는 작업으로 이어지고 있다.

미래를 여는 새로운 자원으로서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전통을 고부가 가치로 재창출하려는 전공자의 억척스러운 쟁이의 고집이 요구된다. 해서 우리 회사 브랜드명이 《비단쟁이 칸(Artisan Khan》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