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투데이 차한지 기자 | 이태원 사고로 사망한 망자들의 천도의식이 사고현장에서 봉행 되었다. 이날 천도의식은 우룡스님 집도로 이루어지고 박동 위원장의 혁필 퍼포먼스와 권선국님의 추모곡으로 망자의 한을 풀어주고 위명순 자유 유권자연합 위원장님은 하얀나비로 형상화된 망자의 안타까운 사연을 가슴에 묻고 이승과의 작별을 위한 천도의식을 거행하였다.
박동 위원장은 천도제를 거행하며 하얀나비의 춤을 위한 소외를 표현했다.
우 리 는 하 나 다 ! ! !
우리는 직면한 골목에 발걸음을 멈추게 되었다.
아는것과, 걸어본 것은 분명히 다르다. 직면한 골목엔 체온이 스며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과연 직면한 골목에 스민, 우리의 소년, 소녀 이웃의 죽음은 무엇일까? 라는 질문과 답은 없다.
1999년 씨랜드 참사로부터, 세월호에 이르기 까지 우리는 답을 찾았을까?
결코, 답을 찾기란 쉽지 않음을 알고 있음이다. 우리는 골목의 사유를 ART의 체온으로부터 (용기)를 얻기로 하였다.
친구들은 뱅크시, 마티스, 오마주 작품을 벽화, 퍼포먼스를 함께하기로 하였다. 자유대한민국유권자총연합, 경복궁포럼, 보네르갤러리, 아르떼뽀베라, 만화가 50인 친구들이다.
물론 작은 소요이자 고요의 바다에 침몰하는 하이얀나비춤에 지나지 않음이다.
친구들은 하이얀나비를 이태원 가로수에 헌증하는 퍼포먼스를 기획하였다.
우리는 결코, 질문과 답을 통하여 명백한 (치유)를 얻지 못함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직면한 골목에 발걸음을 멈추게 되었고 친구들 이라는 테제를 읊조릴수밖에 없었다.
뱅크시가 이룩한 우크라이나를 위한 벽화는 우리에게 깊은 감명과 치유를 헌증했다.
물론, 마티스의 (춤)은 용기를 북돋았다.
자유총, 경복궁포럼의 (안아주는 나무와 하이얀나비춤)은 우리에게 (편지)를 쓰게하는 용기를 주었다.
“ART와 치유 우리는 하나다 ! ! ! ” -----STORY다.
우리는 직면한 골목에 발걸음을 멈추고 이세상에서 가장고요하고 염치있는 ARTIST의 헌증을 꿈꾸게 되었다.
물론 158명령의 슬픔은 우리 모두의 슬픔이기에---,
ART와 치유 = 우리는 하나다 ! ! !
아주 오래전 씨랜드 참사가 있었다. 우리의 소중한 소년,소녀가 화마에 생명을 잃었다. 참사는 계속되고 있다. (찜, 짱, 빙고 D프로젝트)는 씨랜드 참사를 딛고 일어설 우리의 치유였다.
스필버그감독의 쥬라기공원에서 영감을 얻은 찜 프로그램은 (궁과 기석을 딲는 문화봉사다)
FACT와 돼지털붓에서 문화유산을 접하는 동기를 얻었다.
우리의 청소년,소년,소녀가 만날 문화유산에 대한 준비다.
1999년 6월 30일 새벽 경기도 화성군 서신면 백미리에 있는 청소년 수련 시설인 놀이동산 씨랜드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유치원 19명, 인솔교사 4명, 23명이 목숨을 잃었다.
FACT다.
우리의 문화유산을 보듬고 사랑하는 방법을 (돼지털) 붓으로 만나기를 소망한 제안이다.
*짱은 (아,나,바,다)
아끼고 나누어주고 바꾸고 다시쓰는 (RECYCLE)운동에서 IDEA를
얻었다. 주변에 버려진물건을 스스로 챙겨 장을 여는 프로그램이다.
물론 (덕수궁 돌담길)에서 우리의 청소년,소년,소녀가 기획하고 운영하기를 제안했다.
*빙고는 (BING GO)
게임 오락용어의 탄성이다. 우리의 폭주족은 (문화상품)이다.
켈리포니아 히피폭주족은 오히려 관광상품이자, 어젠다다.
그들에게 (통일로)를 헌사한다. 단 (유용한 시간을 정하여)라는 전제다.
찜, 짱, 빙고, 프로그램의 제안은 늘 마음에 담아온 테무다.
담배, 술, SEX, 그리고 폭행의 위협으로부터 컴퓨터,플로링,뮤직,드링크를 연결한 Caf`e Room을 설계한 제안은 (콜라텍)으로 자리메김 되었다. 참으로 씁쓸한 귀결이지만 이십여년전의 회고다. D프로젝트다.
이십여년 줄곧 *찜 프로그램은 시상처럼 떠올리고 일상처럼 맞이했다.
궁 청소 프로그램이다.
궁과 서울골목에서 만나는 (사금파리)는 씨랜드 참사의 오브제처럼 환원되었다.
한지묶음 문화 일기장 프로그램의 시작점이다.
청소년 문화학습으 요구는 (그들의 열정)에 담아냄이 마땅하다.
천착의 사유 아닐까 !
요즘 (단테의 신곡)을 다시 읽고 있다. (청와대 용산품으로)의 보물지도 프로그램이다.
1999년 씨랜드 참사의 STORY는 청와대 용산 국민품으로의 씨앗을 밝힌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는 304명의 우리의 소중한 소년, 소녀가 세월호 침몰과 함께 우리의 곁을 떠났다.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1번 출구 골목에서 158명의 우리 청소년, 소년, 소녀가 압사로 우리의 곁을 떠났다.
결코, 일어날 참사가 아님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음에도,
1999년 6월 30일 씨랜드참사,
2014년 4월 16일 세월호참사에 대한 ART와 치유 우리는 하나다.의 제안을 떠올릴 뿐이다.
우리 모두가 걸음을 멈추게 하고 우리 모두가 슬픔이라는 마음을 땅과 하늘에 수놓을수 있는 마당이자, 골목이다.
(축제)에서 맞이한 슬픔은 우리의 소중한 젊은이들의 꿈이 사라졌기에 그러하고 (축제의 연결)은 한 마리 나비였다.
(蝴淵不二) 노, 장, 사유의 나비춤 잔상일지라도, 불교사상의, 중심결이 (不二) 즉자적인 우리는 하나다. 일 뿐이고 걸음을 멈추게 한다.
물론 이태원 골목에서다,
몇 개월 전, 북한산성 서암사복원 보존 책임을 맡아 산행답사길을 오르던중 후원회장께서 간절함을 토로했다.
이제 선거도 끝났으니 그만들 다투고 (우리는 하나다 ! ) 라는 제안으로 광화문광장에서 멋진 (축제)를 제안 하였다.
진보, 보수 (충돌)은 승자 패자처럼 요란할지라도,
이제, 그만
대한민국 보금자리에서 새로운 마음을 담아내자는 (울림)이다.
맞아 시대공명법칙의 사유임을 몇일 후에야 깨닫게 된다.
서암사 후원회장은 해병대 근무로 다져진 애국국민일지라도 절절함이 (소명)으로 싹을 틔운 것이 아닐지?
여하튼 긴 들쉼은 다지고 우리는 하나다. 제호를 우리의 마당에 펼치기로 하였다.
사실 씨랜드, 세월호, 이태원 참사의 치유는 우리 모두의 책무다. 그럼에도 (노오란 리본)에 담겨진 분노와 저항은 왜곡 되었다.
그 들이 만들어 놓은 그 들을 위한 (추모곡)속의 변질임을 알고있다.
세월호와 노오란리본에 담아낸 변질이다. 우리는 하나다.의 탄생은 새로운 시대에 대한 비전이자, (꼭지점)으로 사유되었음에 망설임 없이— 이태원 참사의 (노오란 리본)에 대한 (경종)으로 환원 되었다.
하이얀 나비춤이다.
찰라처럼, 축제의 비극은 우리마당 골목에서 ( ! ) - ,
우리는 뱅크시의 우크라이나참사의 오마주 작품을 살펴보았다. 물론 마티스의 (춤) 또한 알래고리하기로 하였다.
때로는 쉰들러리스트의 스필버그의 (마음)을 소환하는데 동의하였다. 그렇다면 이, (협소한 골목)의 서사를 위하여 무엇을 할수 있을까?
곰곰이 돌이켜 보아도 도무지 알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우리 모두는 (안아주는 나무) 프로그램을 다시한번 돌이켜 보았다.
40여년의 문화운동 현장에서 79년 삼각산, 북한산성, 대서문, 대동문을 마주하던 아득한 아픔과 다짐의 소요앞에서, 복원운동을 다짐하던 열아홉의 소년이 어느덧, 고려불화, 몽유도원도 반환운동을 전개하던 인사동 차없는 거리에 청, 장년의 (불태움)을 사유함이 무엇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9년 씨랜드 참사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망연함은 체울수 없는 소요에 지나지 않음이다.
40여년의 문화운동을 어느덧 마무리함을 다짐하며, 켜켜한(가로수) 체온으로부터 온갖 냉소를 터안은 (플라타나스) 바이올렛 마테르를 마주함은 십여년전의 일이다.
(안아주는 나무) 프로그램이다.
이태원 골목의 ( ? )은 삼각지 입구에서 즐비한 플라타나스 가로수를 하나, 하나 품어보며 (씨랜드, 세월호, 핼로윈) 참사의 그 들의 꿈으로 환원 하였다.
종로의 가로수는 광화문 사거리에서 흥인지문에 이르는 맛이 으뜸이지만 안국동, 인사로 초입에 이르는 -, 율곡로와 대학로, 국악로의 그것은 옛 청와대 길 (플라타나스)의 나이테는 아마도 세종로 은행나무, 느티나무, 가로수도 어느덧 우리의 (동행)임을 만끽할수 있음이다.
40년의 사유이다. 치유의 골목을 위하여
158명령의 (나무)로 품어내는 퍼포먼스를 시작한다.
안아주는 나무와 하이얀나비의 춤, (멜로디)를 소망한다.
우리사회는 많은 대형사고와 죽음이 있었다.
남양호침몰, 서해훼리호침몰, 성수대교붕괴, 삼풍백화점붕괴, 씨랜드화재, 대구지하철화재,천안함피격, 세월호침몰, 등 인명피해가 많은 사건사고가 있어도 위령제와 정부사과 등이 전부였었다.
그러나 세월호 사고 부터는 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