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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홍범도는 누구인가

홍범도의 행적

우리투데이 차한지 기자 |  아래 글은 역사 전문기자인 김용삼 기자(전 월간조선 편집장)가 홍범도에 대하여 쓴 과거의 글입니다. 요즈음 文시절 세운 육사 교정의 홍범도 흉상 이전계획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데 그의 행적이 궁금하시면 참조 바랍니다.

 

연해주 한인 사회는 1884년 이전에 도강하여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 경우 1가호당 15데샤치나(약 4만 9,000평)의 토지를 분배받았다. 이를 토대로 재산을 불려 부농이 된 사람들이 원호인(元戶人)이라는 지도층을 구성했다. 반면에 그 후 두만강을 건너온 사람들은 토지를 분배받지 못해 광산 노동자, 소작, 어부, 날품팔이로 어렵게 살면서 여호인(餘戶人)으로 불렸다.

 

같은 한인 동포지만 부의 정도가 현격하게 달랐으니 러시아에서 10월 혁명의 후폭퐁으로 적백 내전이 발발하자 재산을 둘러싼 분쟁이 극한을 치달았다. 원호인들은 재산을 지키기 위해 백군과 그들을 지원한 미국·일본 등 연합군 편에 섰고, 여호인들은 부자들 재산을 빼앗기 위해 공산혁명을 지지하는 적군에 가담하여 빨치산 세력을 형성한다. 양측은 적대세력이 되어 서로가 서로를 밀고하여 죽고 죽이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연출되었다. 그 비극의 뇌관을 격렬하게 때려 대폭발을 일으킨 사건이 1921년 6월 28일 발생한 자유시 참변이다.

 

홍범도는 이동휘가 중심이 된 한인사회당(상하이파 고려공산당)과 가까운 관계였다. 홍범도도 이동휘 일파가 선동한 “독립군의 통합 및 소련 적군의 보급 지원”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가 1921년 봄 러시아 자유시(스보보드니)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과 상하이파 고려공산당 간에 헤게모니 쟁탈전이 작렬한다. 이르쿠츠크파가 우세한 정황이 전개되자 홍범도는 재빨리 상하이파 진영을 탈출, 이르쿠츠크파 진영으로 투항한다. 그 직후 자유시 참변이 발생한다.

 

자유시에서 한인 무장부대가 동료 대원 수백 명 사살·체포

일본군을 시베리아에서 철군시키기 위해 다롄(大連)회담에 임한 레닌 정부는 일본 측으로부터 철군의 전제조건으로 연해주와 간도 일대에서 활동하던 한인 무장부대의 해산을 요구받는다. 레닌 정부는 이 일을 추진하기 위해 이동휘에게 금화 100만 루블이라는 천문학적인 뇌물을 제공하고 공수(攻守)동맹을 체결한다.

 

레닌이 이동휘에게 제공한 막대한 뇌물은 공짜가 아니었다. 첫째,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공산화할 것, 둘째, 연해주와 간도 일대에서 활동하는 한인 무장부대를 소련 적군 산하로 편입시킬 것. 이 두 가지를 처리하는 대가가 금화 100만 루블이었다. 이동휘는 연해주와 간도 일대의 한인 무장부대를 자유시로 유인하기 위해 “독립군 대통합으로 단일 지도부 형성”, “소련으로부터 무기와 보급 지원”을 내세워 한인 무장부대를 자유시로 끌어들였다.

 

레닌 정부로부터 금화 100만 루블이라는 천문학적인 자금을 받고 한국 무장 독립부대를 자유시로 끌어들인 이동휘. 그는 한인 독립군들을 유인하기 위해 "한국 독립군 단일 지도부 형성, 소련 으로부터 무기와 보급 지원"을 선동했다.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 무장부대 중에는 소련 적군 산하로 편입되는 것을 원치 않는 세력들이 많았다. 한인 독립군 부대 중 절반 이상이 소련 적군 편입을 거부하고 저항하자 레닌 정부는 무장 해제를 명령한다. 저항하는 한인 무장부대의 해산은 소련 적군 및 그들과 손잡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산하의 한인 무장부대가 담당했다.

 

홍범도는 재빨리 수백 명의 동료들을 사살·체포하는 편에 선다. 그 결과 숨이 끊어진 자들은 저승으로, 목숨이 붙어 있는 자들은 시베리아 벌목장으로 끌려가 무장부대의 씨를 말려버리는 작업에 일조한다.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이 주최하는 제1회 극동 제(諸)민족대회(극동인민대표대회)가 열렸다. 홍범도는 한인 무장세력 대표로 선출되어 모스크바를 방문한다. 대회 참가 직후 홍범도는 레닌과 면담하는 성은을 입는다. 레닌은 홍범도에게 “혁명정권에 협조해줘 감사하다”면서 러시아 화폐 100루블과 군복 한 벌, 홍범도 이름이 새겨진 권총을 선물로 주었다(장세윤,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영웅 홍범도』, 역사공간, 2017, 221~223쪽). 레닌이 하사한 군복과 권총을 홍범도는 죽을 때까지 곱게 모셨다. 

 

자유시 참변 당시 가해자 편에 가담하여 동료 한인 무장대원들을 사살, 체포하는 데 일조한 홍범도. 그는 자유시 참변 후 모스크바를 방문, 레닌에게 보고하며 그로부터 권총과 군복, 러시아 돈 100루블을 선물로 받았다. 그의 사진에서 옆구리에 차고 있는 권총이 레닌이 선물한 것이다.

 

잔치가 끝나면 사냥개를 삶는 법이다. 소련은 자신들에게 협조한 홍범도 이하 이르쿠츠크파 한인 무장부대를 이르쿠츠크에 모아놓고 공산화 교육을 시킨 다음 해산시켜버렸다. 한인 무장부대가 해산당해 갈 곳이 없어진 홍범도는 1923년 8월 이만 근처의 까잔린구역 토지를 지급받는다.

 

여기에 집단농장을 세우고 4년여 농사를 짓고 벌을 쳤다. 1927년 10월, 소련공산당에 가입한다. 당증 번호는 578492번. 1928년 7월부터 이만 남쪽 스파스크 진동촌으로 이주, 항카호 부근 카멘노 뤼발로프 초원 치머우에 있는 ‘항카의 별’ 콤비나트 지도자로 농사를 지었다(장세윤, 앞의 책, 227~228쪽).

 

1937년 9월 초 스탈린의 명에 의해 카자흐스탄의 시르다리야강 근처 전 아뤼크촌 사막지대로 강제 이주 당한다. 1938년 4월, 생활환경이 좀 나은 크즐오르다 시로 이주한다. ‘백두산 호랑이’ 홍범도의 생애 마지막 직책은 크즐오르다의 조선극장 수위장이었다. 그는 1943년 10월 25일 그곳에서 눈을 감았다. 이것이 한국인들이 영광스런 징표로 추앙하는 연해주·간도 항일무장부대의 항일투쟁사 뒷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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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평론)
과연 상하이에서 동고동락했던 상하이파 독립군 동지 육백명을 일본과 소련 공산당의 사주로 소련으로 끌고간 이동휘와 홍범도를 어떻게 볼 것인가? 독립군이 소련으로 이동하는 중 소련 주민 약탈죄로 무장해제 당할 때 독립군 중 이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재판받을 때 세명의 재판관 자리에 홍범도가 들어가 독립군을 처형하고 일부는 무장해제시켜 시베리아로 쫓아내버린 판결에 동참했으니 어찌보면 배신자가 된 홍범도를 독립 유공자로 볼 것인가? 

일본과 소련의 밀약(시베리아 주재 일본군 철수 대신에 항일 독립군을 소련에서 유인하여 무장해제시켜달라는)도 모르고 상하이파 독립군을 소련에서 봉급과 무기지원을 해주겠다는 사탕발림으로 소련으로 몰고가서 살상으로 무력화시킨 이동휘와 홍범도는 과연 독립 유공자로 서훈할 대상인가 아니면 소련과 일본의 밀약에 부역한 반역자인가? 그렇다면 홍범도는 소련에서 소련군에 편입하여 대위 계급장을 달고 우리 독립군이 학살당한 "자유시 참변"을 보고하기 위해 레닌을 독대한 자이니 친일파 역할을 한 셈이 된다.

 

이 역사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은 문재인이 평양출신인 홍범도 시신을 시베리아에서 현충원으로 모셔오고, 육사 교정에 흉상을 건립했어도, 박정희 정부에서 고증 부족으로 서훈을 했어도 놀라지 않았다. 이제는 정확한 고증으로 바로잡을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