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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300년 가업 이어온 명륜당 지킴이 담장 고친다고 퇴거명령 날벼락

고구려 소수림왕 2년에 태학(太學)

 

우리투데이 차우수 기자 |  성균관 수복(守僕)은 우리의 전통.전승 문화의 뿌리다

멧돌에 어처구니가 없다. 성균관에 수복(守僕)이 없다.

300년 가업을 이어온 수복(守僕)을 내쫓는 문화제청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성균관의 연원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에 태학(太學)을 설립한 때로부터 시작된다. 신라시대 682년에는 국학이 설립되었고, 백제시대에는 374년에 고흥을 박사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로 들어와 930년 서경에 학교를 설치하고, 992년에 국자감을 설치하였다.

고려의 국립대학인 국자감(國子監)이 충렬왕(忠烈王) 24년(1298)에 성균감(成均監)으로 되었다가 충선왕(忠宣王) 즉위년(1308)에 성균관이라 하였다. 공민왕(恭愍王) 5년(1356)에 국자감으로 환원하였다가 1362년 다시 성균관으로 고쳐서 조선시대에 계속 대학의 명칭으로 사용하였다. 고려시대 때의 위치는 개성(開城)에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서울[漢陽]의 숭교방(崇敎坊 明倫洞)에 있었는데 현재까지 존속되고 있다.

조선 태조 7년(1398) 7월에 교사(校舍)가 창건되었는데 이 해를 근대 학제 개편 이후의 성균관대학교 창립 연도로 삼고 있다. 태조 당시에는 유학(儒學)을 강의하는 명륜당(明倫堂), 공자(孔子) 및 중국과 한국의 역대 성현들을 모신 문묘(文廟:大成殿, 東ㆍ西廡), 유생(懦生)들이 거처하는 동ㆍ서재(東ㆍ西齋) 등이 있었다. 성종 때에 향관청(享官廳)과 존경각(尊經閣:도서관)이 세워졌고 현종(顯宗) 때에 비천당(丕闡堂:제2과거장)이, 숙종(肅宗) 때에 계성사(啓聖祠:공자 및 五聖의 父를 奉安)가 증설되었다. 고종(高宗) 24년(1887) 경학원(經學院)을 부설하였다.

고종 32년(1895) 성균관 관제(館制)를 칙령 제136호로 반포하여 성균관은 문묘를 받드는 기관으로 하고 교육은 경학과(經學科)에서 전담하게 하였다. 반상(班常)의 구별 없이 인재를 육성하겠다는 교육의 기회 균등을 밝혔으며 시대적 요구와 추세로 인하여 '문명(文明)한 진보(進步)에 주의(注意)함을 요지(要旨)로 함'을 발표하였다.

1910년 한ㆍ일합병으로 인하여 성균관과 향교의 재산을 분리하고 교육을 일체 중지하여 국립대학과 민족 교육의 맥을 끊었고, 명칭도 경학원(經學院)으로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그 대신 일제는 식민지 교육을 위하여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犬學)을 1924년 설립하였다. 당시 전국의 유림(儒林)이 주권을 지키려는 운동으로 의병활동(義兵活動)과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 등을 일으키고, 통문(通文)을 돌려 성균관의 교육 기관으로서의 기능 회복을 선도하자 그 회유책의 일환으로 1930년 명륜학원(明倫學院)을 설립하게 되었다. 1939년에 명륜전문학원으로, 1942년 명륜전문학교로 명칭이 바뀌었지만 진실한 유학 교육과 문화 창달에 미치지 못하고 일본의 변질된 황도유학(皇道儒學)을 강요하게 되었다. 교과 과정에 있어서도 국민도덕ㆍ일어ㆍ일본사ㆍ교련 등을 넣어서 그들에 영합하는 교육으로 변모하였다. 그것마저 1943년 폐교 조치가 되고 청년연성소(靑年鍊成所)로 바뀌게 되었다.

[출처] [2024.06.03] 성균관 명륜당|작성자 오타 지적질 금지

 

성균관의 은행나무는 보물이다.

300년동안 은행나무를 가장 사랑한 사람은 누구일까?

물론 수복이다. 과연 은행나무는 건강할까?

건강할리 없다. 성균관은 자물통 형무소처럼 처형되었다.

 

사람의 사랑과 온기가 없다면 성균관은 폐허가 된다.

숭례문 화재사건으로 수복(守僕)을 쫓아냈다고 하지만, 곰팡이와 습기, 음습함으로 가득찬 자물통 형무소가 되었다.

 

성균관은 기꺼이 성균관을 국가의 재산으로 기부채납하였다.

성균관의 철학과 전통을 기부체납한 것은 아니다.

기부체납을 받은 문화제청은 등기완결과 동시에 성균관의 (철학과 전통)을 강탈했다.

모든 재산권을 성균관으로부터 양보 받은양 월권을 행사한다.

성균관을 300년 지켜온 수복 철학을 부동산 매매등기처럼 양도, 양수하는 만행을 행정명령으로 집행했다.

성균관은 이제 어처구니 없는 멧돌이 되었다.

 

우리는 전통.전승 문화를 지키고 후대에 온전히 물려주어야할 책무가 있다.

문화제청은 300년 전통.전승 문화를 지켜온 성균관 수복을 온전히 전승하여야할

책무를 깨달아야한다.

숭례문 방화사건과 수복문화와 무슨 관련이 있나!

 

남한산성, 북한산성, 수원성,,,에는 스님들이 승병역활하는 사찰이 있다.

신성한 호국불교를 지킴은 물론 성을 지키고 보수하는 책무를 함께했다.

지금의 성은 나라를 지키는 국방의 역할을 넘어 전통.전승 문화를 지키는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그런데 그곳을 지키던 스님들을 쫓아내는 일은 없다.

오히려 유유히 내려오는 전통.전승 문화를 연결하는 우물 물처럼 청량할 뿐이다.

성균관의 수복이는 성균관의 우물 물이다.

청량한 문화의 샘을 지키는 문화의 수문장이다.

 

성균관의 화재를 지키는 수문장임을 깨달아야한다.

뿌리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깊은샘, 맑은물은 마르지 않는 섭리요, 순리다.

그 어떠한 비유를 삼아도 성균관의 수복(守僕)을 숭례문 방화사건으로 내쫓는 만행과 오류는 바로 잡아야한다.

 

조선 영조때부터 성균관 수복(守僕)을 가업으로 이어오고있는 이욱씨와 성균관 제주(祭酒)일을 평생도맡아온 어머니 김인겸씨를 성균관에서 쫓아내는 일이 현실이라는 기사를 보고 성균관을 찾아 현장을 살펴보았다.

 

1년에 2차례 열리는 석전(釋奠)준비, 석전대제에 쓰일 음식과 술, 제기, 식사를 준비하는데 20일이 소요된다.

3만3,000m2 성균관내 모든 건축물과 뜰을 관리하고, 매달 두 번 열리는 정기분향 준비도 해야한다.

어머니 김인겸(88세)씨는 90을 바라본다. 어머니 김인겸씨는 성균관 사람이다.

 

스물셋에 결혼해 남편을 도우면서도 음복주 제조, 음식장만등 제주(祭酒)를 담당해왔다.

과연 수복이가 없는 성균관은 제주는, 어느곳에, 어떻게 마련할까!

성균관 뜨락에서 아들 셋을 낳고 키운 성균관의 수복철학은 이제 슈퍼마켓에서 제주를 납품받아야하는 어처구니없는 멧돌이 아니고 무엇이랴!

 

어찌되었든 옛 어른이 돌아가시면 뜰안의 나무마저 명을 다했다는 이야기가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것은 무엇일까!

300여년을 지키고 사랑을 품은 성균관 은행나무의 수복을 생각한다.

문화제청은 바른마음으로 성균관 수복전통, 전승문화를 지켜내야함을 엄중히 제안한다.

또한 즉각 수복(守僕)의 거처를 성균관뜨락으로 모셔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