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투데이 차한지 기자 | 바른언론을 위한(기자,아카데미 선언)
저널리즘은 견고하고 전통이 있으며 존경받던 영역에서 섬세하고 자유스러우며 친절함으로 가득 찬 엔터테인먼트 영역으로 이동했다.
치열하며 고천적이지만 전문가의 특별함은, 담아낸 그들만의 리그에서 너무나 소박하고 저 차원적이리만큼 조크와 위트, 오히려 선정적이기까지 한 놀이와 게임, 특별한 영광과 영감과 도전 정신으로 축제처럼 펼쳐지는 광장이, 아마추어적이지만 결코 아마추어적이지 않은, 미디어 콘텐츠 중심에 저널리즘의 꽃이 활짝 피었다.
누군가는 이념, 종교, 경제, 학문, 사회, 일반의 주도권을 위한 열망으로 실험하는 방향성에 대하여 <바름>, <그릇됨>의 논지를 가지고 도전하려고 한다. 우리는 도전에 앞서, 전제한 저널리즘의 진화와 진보적 언론 환경을 적절하고도 효율적인 진단을 중요시 하였다.
또한 우리는 주도적으로 성과를 내고 실험적인 열정을 통하여 이룩한 언론 환경의 선두 그룹의 대한, 명백한 방향성을 고찰하기로 하였다.
이른바 시대의식과 시대 정의에 대한 함의와 비판 정신의 맥락이다.
그럼에도 왜? 이일을 수행하여야 하며, 극도의 긴장감을 유지하여야 하는가에 치열한 담론의 현장성을 살펴보았다.
일찍이 경험해 보지 않았던 사상적 논리의 궤적이 대척점을 이루며 우리 사회 내부에 내재적으로 작동하는 본질에 대한 질문과 답이다.
오히려 정제된 탈 언론 탈 저널리즘의 요구는 앞서 제시한 저널리즘 생태계의 모든 영역이 분화되었다. 제4의 권력 도구이자 영역인 언론 환경의 주도권은 대체제인 정보혁명의 부산물이자 역기능이며 순기능이 동시에 실험되고 있는 진행형 임에도 우리 사회의 모든 영역에 건강함을 위한 <균형적 저널리즘>의 요구다.
우리는 매우 선도적이며 선언적이기까지 한 진보 저널리즘의 압도적 호소력 틀 안에 잠재되어 있다. 미디어 권력의 축이 재련된 기술자들의 실험장에 용해된 상황이다.
이른바 반지성주의에 대한 진단은 자정 능력을 상실했다.
극단주의, 포퓰리즘, 팬덤, 네오막시즘에 이르는 현란한 진화와 융합을 통하여 진보 정당, 친북 정당, 파괴적 노동세력, 반정부 집단의 스피커폰으로 자립 매김 된다.
분단 이데오르기, 식민 이데오르기를 훌쩍 뛰어넘어 지역, 세대, 성별에 극단적인 혐오, 증오, 분열의 콘텐츠를 광범위하게 공급, 재생산한다.
여론 주도형, 세트 상품이 된지 오래다.
그 무엇도 철옹성처럼 작동하는 폐륜적 저널리즘의 횡포를 막을 수 없다.
그 자체가 독이든 설탕을 먹은 대중의 집합체를 막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반지성주의와 극단주의 <해악>이 저널리즘 고유성을 점령했다.
저널리즘의 명백한 정황은 오히려 바름, 옳음에 대한 기회로 살펴봄도 타당해 보인다.
그럼에도 저널리즘의 유구함과 진화, 진보의 과정 정보화혁명에 따른 미디어 생태계의 싸이클 패러다임의 대한 명증위에서 새로운 비전을 설계함이 마땅하다.
<우리가 답이다>
<조.중.동>의 탁월함, 특별함, 독보적 언론시장에 <말>지의 오OO은 방향성을 모색하게 이르렀다.
2000년 2월 22일 오후 2시 22분 창간한다.
모든 시민이 기자다. 기자가 되기 위해서 매우 높은 기자채용의 문턱을 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 보고 ‘왜 저렇게 힘든 과정을 거쳐야만 기사를 쓸 수 있나? 통과하지 못한 사람 중에서도 얼마든지 기사를 쓸 수 있는 사람이 있는데 기자가 아닌 일반인들도 기사를 써 볼 수 있어야지.
참신하기도 할 뿐더러 첫 번째 <조.중.동> 카르텔을 받아들인 2번째 방향성의 경의를 표현한다.
<병풍사건>, <조국사태>, <UAE원전>, <천안함>, 괴담과 어용의 늪에 빠지게 된 것은 2번째 방향성을 상실한다.
<왜곡장> 이다.
1번째 <조.중.동 카르텔>, 2번째 <오마이뉴스 왜곡장>을 균형감, 생명성, 옳바름의 정의, 바른언론에 대한 3번째를 선택했다.
카르텔 왜곡장을 치유와 환원을 위한 언론 균형이다.
2024년 모월 3일 3시 33분에 바른 언론 창단이다.
우리의 존재로부터 치열했던 언론의 시험지대는 <균형>, <건강함>을 유지한다.
일단의 노선에 점령당한 여론의 향배는 질병에 가깝다. 이른바 반지성주의에 중독된 여론 징후다.
네오막 시즘의 극단주의 만남은 의식화를 넘어 여론의 자정능력을 상실한다. 비판과 견제, 건강함을 유지하는 정의는 극단적으로 매도된다.
포퓰리즘, 펜덤주의는 <마녀사냥>, <괴담>의 역동성으로 여론 자체가 없다. <가짜뉴스>의 횡횡은 오히려 잇슈자체로 소통 공유된다. 정보영역으로 확장되고 희화화 하지만 오롯이 팽창된다.
극단주의, 마녀사냥, 괴담 유포의 숙주공장이다.
독이든 설탕을 먹은 반지성주의에 대한 명백한 치유는 시대의 명령어가 되었다.
우리는 독이든 설탕을 먹은 반지성주의에는 약이 없음을 알고 있다. 맹목적으로 팬덤, 포퓰리즘, 극단주의, 네오막시즘, 반지성주의에 이르는 의식화에 도구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언론의 도구하다.
중국의 문화혁명 나찌의 언론 장악이다. 여론과 군중 대중선동의 도구로 우리 사회는 반성주의에 전도되었다.
가짜 뉴스와 괴담, 감시견과 바른 언론을 위한 플랫폼 기자 아카데미에 요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