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世 檀君 扶婁 在位 五十八年. 位 辛丑 元年 帝 賢而多福 居財大富 與民共治産業 無一民飢寒 每當 春秋 巡省國中 祭天如禮 察諸汗善惡 克愼賞罰 浚渠洫 勸農桑 設寮興學 文化大進 聲聞日彰 初 禹 舜 置 幽營二 州 於藍國之隣 帝 遣兵征之 盡逐其君 封東武 道羅 等 以表其功 神市以來 每當祭天 國中大會 齊 唱讚德諧 和 於阿爲樂 感謝爲本 神人以和 四方爲式 是爲 叅佺戒. 其詞 曰 於阿 於阿 我等 大祖神 大恩德 倍達國我 等 皆百百千千年 勿忘 於阿 於阿 善心 大弓成 惡心 矢的成 我等 百百千千人 皆大弓絃同 善心直 矢一心同 於阿 於阿 我等 百百千千人 皆大弓一 衆多矢的貫破 沸湯同善心中 一塊雪惡心 於阿 於阿 我等 百百千千 人 皆大弓堅勁同心 倍達國光榮 百百千千年 大恩德 我等 大祖神 我等 大祖神 檀君 扶婁 壬寅 二年 帝 召 少連大連 問治道 先是 少連大連 善居喪 三日不怠 三月不懈 朞年悲 哀 三年憂 自是擧俗 停喪五月 以久爲榮 此 非天下之大聖 其能德化之流行 如是傳垂之速者乎 二連以孝聞 亦見稱於 孔子 夫 孝者 愛人 盖世之本 放諸四海 而準焉 癸卯 三年 九月下 詔 民編髮蓋首 服靑衣 斗衡諸 器 悉準於 官 布苧市價 無處有二 民不自欺 遠近便之 庚戌 十年 四月 劃邱井 爲田結 使民 自無私利 壬子 十 二年 神 誌
<古記> 云 王儉 父檀雄 母熊氏 王女 辛卯 五月 二日 寅時生 于檀樹下 有神人之德 遠近畏服 年 十四 甲辰 熊氏王 聞其神聖 擧爲裨王 攝行大邑國事 戊辰 唐堯時 來自檀國 至阿斯達 檀木之墟 國人推爲天 帝子 混一 九桓 神化遠曁 是謂 檀君王儉 在裨王 位二十四年 在帝位 九十三年 壽 一百三 十歲 戊辰元年 大始 神市之 世 四來之民 遍居 山谷 草衣 跣足 至開天 一千五百六十五 年 上月三日 有神人 王儉者 五家之魁 率徒八百 來御于 檀木之墟 與衆奉祭 于三神 其至 神之德 兼聖之仁 乃能奉詔繼天 巍湯惟烈 九桓之民 咸悅誠服 推爲 天帝化身 而帝之 是爲 檀君王儉 復神市舊規 立都 阿斯達 建邦號 朝鮮 王儉 詔 曰 天範 惟一 弗二厥門 爾惟純誠 一爾心 乃朝天 天範 恒一 人心 惟同 推己秉心 以及人 心 人心惟 化 亦合天範 乃用御于萬邦 爾生有親 親降自天 惟敬爾親 乃克敬天 以及于邦 國 是乃忠孝 爾克体是道 天有 崩 必先脫免 禽獸有雙 弊履有對 爾男女以和 無怨 無妬 無淫 爾嚼十指 痛無大小 爾相愛 無胥讒 互佑 無相 殘 家國以興 爾觀牛馬 猶分厥芻 爾互讓 無胥奪 共作 無相盜 國家以殷 爾觀于虎 彊暴不靈 乃作 孼 爾無桀 騖 以戕性 無傷人 恒遵天範 克愛物 爾扶傾 無陵弱 濟恤 無侮卑 爾有越厥 則 永不得神 佑 身家以殞
행촌 이암은 경상남도 고성군(固城郡) 송곡촌(松谷村) 앞 바닷가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다. 회양부사(淮陽府使) 이우(李瑀)의 장남으로 어머니는 충렬왕 때 김방경(金方慶)의 중군(中軍) 지병마사(知兵馬使)로 일본 정벌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운 박지량(朴之亮) 장군의 딸이다. 마지막으로 부인은 충렬왕 때 세 번이나 재상을 지내면서 일본 정벌에 전함을 만들어 공을 세우고, 충렬왕에게 '편민십팔사(便民十八事)'를 올려 명성을 떨쳤던 홍자번(洪子藩)의 증손녀이다. 행촌 이암은 17세 되던 1313년 충숙왕 즉위년 8월에 문과에 합격했으며 비서성 교감(秘書省校勘)을 시작으로 비서랑(秘書郞) · 단양부 주부(丹陽府主簿) · 도관 정랑(都官正郞)을 거쳐 감찰 집의(監察執義) ·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 밀직부사(密直副使) · 찬성사(贊成事)를 두루 역임하고 청평산(淸平山)에서 5년간의 은거생활을 마친 후 1358년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이르렀다. 행촌 이암은 공민왕이 환도한 이듬해(1363년 2월) 강화도로 은퇴했다. 선행리(仙杏里) 홍행촌(紅杏村)에 해운당(海雲堂)이라는 집을 짓고, 스스로 '홍행촌수(紅杏村叟)'라고 불렀다. 이곳은 선원사(禪源寺)와 그리 멀지
우리투데이 이승일 기자 | 춘천 중도에 금사학회를 비롯해 한민족전통문화계승연합회 등 연이어 방문해서 중도유적지킴이들이 한층 고무되고 있다. 특히 이날 참석자중에는 류준기 한국고고학연구소 회장 내외가 참석에 주목을 받았다. 류준기 회장은 "우리 한민족의 역사가 깃든 중도유적을 지키기위해 전국에서 몰려온 중도유적지킴이들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며, "올해 계묘년에는 반드시 레고랜드 사건이 해결되어 그동안 노력이 헛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한편 중도유적보존범국연대회의 오정규 본부장은 "전국에서 춘천 중도를 찾아오겠다는 문의가 잇따르고 있어 올해는 반드시 결실이 벌어질것으로 보인다"며, "춘천 지역민들도 요즘은 중도유적지킴이들을 응원하는 등 한층 분위기가 이전보다 좋아지고 있다"고 전했다.
단군세기 서문 爲國之道가 莫先於士氣하고 莫急於史學은 何也오 史學이 不明則士氣가 不振하고 士氣가 不振則國本이 搖矣오 政法岐矣니라. 나라를 위하는 길에는 선비의 기개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사학보다 더 급한 것이 없음은 무엇 때문인가? 사학이 분명하지 못하면 선비의 기개를 진작시킬 수 없고, 선비의 기개가 진작되지 못하면 국가의 근본이 흔들리고 나라를 다스리는 법도가 갈라지기 때문이다. 盖史學之法이 可貶者貶하고 可褒者褒하야 衡量人物하고 論診時像하니 莫非標準萬世者也라 斯民之生이 厥惟久矣오 創世條序가 亦加訂證하야 國與史가 竝存하고 人與政이 俱擧하니 皆自我所先所重者也라. 대개 역사학을 하는 방법이란 잘못된 것은 비판하고(可貶者貶), 기릴 것은 찬양해서 인물을 저울질하여 평가하고 시대의 모습을 논하여 진단하는 것이니, 만세의 표준이 아닌 것이 없다. 우리 민족의 삶은 참으로 유구하다. 새로운 세상을 열고 질서와 법도를 세운 내용(創世條序) 또한 분명히 밝혀져 있어, 나라와 역사가 함께 존재하며 사람과 정치가 함께 거론되니, 나라와 역사와 사람과 정치(國, 史, 人, 政), 이 네 가지는 모두 우리 스스로가 우선시하고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로다. 嗚呼라 政猶器하고 人猶道
우리투데이 이승일 기자 | 행촌 이암은 고려 25대 충렬왕 때 왕명을 출납하는 판밀직사사 겸 보태자감국(세자를 보필)을 역임한 이존비의 손자로써 약관 17세의 나이로 고려 26대 충선왕 5년(1313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다. 이후 27대 충숙왕, 28대 충혜왕, 29대 충목왕, 30대 충정왕, 31대 공민왕까지 6대 왕을 모시는 동안 수문하시중(현재의 국무총리)을 두 번이나 역임하는 등 공민왕 11년인 1362년까지 만 50년 동안 관직에 봉직했다. 이듬해인 1363년 2월에 강화도로 은퇴하여 10월에 단군세기를 지으시고, 그 다음해인 1364년 5월 5일 향년 68세로 세상을 떠나시게 된다. 행촌 이암의 전 생애는 100년에 가까운 원나라의 간섭시대 속에서 오직 이를 극복하여 자주 독립국 '고려'를 세우려는 애국의 일념으로 점철되었다. 특히 '단군세기'를 섣불리 세상에 내어 놓았다가는 오히려 이 서적과 내용이 사멸될 수도 있다는 염려에서 가문에 비밀히 간직하도록 당부하였다고 전해진다. 현재 강화도 선원사에는 '해운당'이라고 붙여있기는 하지만, 차마 밖으로 드러낼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우리투데이 이승일 기자 | 우리투데이는 2023년 1월 20일자 지면신문부터 '한단고기' 연재를 시작한다고 밝혔다. '한단고기'는 한(韓)민족의 역사를 다룬 '삼성기(三聖記)', '단군세기(檀君世紀)', '북부여기(北夫餘紀), '태백일사(太白逸史)'라는 4종의 문헌이 묶여 있는 형태이다. 그중에서 우리투데이는 고려 공민왕 시절에 문하시중을 지낸 행촌 이암이 인천 강화도에서 선원사 경내에 '해운당'이란 정자를 지어놓고 '단군세기(檀君世紀)'를 썼다는 기록과 조선 중기의 문신이었던 이맥이 쓴것으로 잘 알려진 '태백일사' 두권에 대해서만 연재를 하기로 했다.
우리투데이 이승일 기자 | 고성이씨동추공파종중(固城李氏同樞公派宗中)은 2023 계묘년(癸卯年)을 맞이하여 1월 7일 청원재(聽源齋)에서 신년교례회(新年交禮會)를 갖고 종원(宗員)들간의 친목(親睦)과 종중발전(宗中發展)을 위한 결의(決意)를 다지는 시간(時間)을 가졌다. 개회사(開會辭), 선조(先祖)님에 대한 묵념(默念), 회장 인사(會長 人事), 원로 격려사(元老 激勵辭), 윤회 악수(輪回 握手)를 통(通)한 교례(交禮) 순(順)으로 진행(進行)되었는데 회장(會長)(이희재 李熙宰,32세(世))은 인사(人事)말에서 종사(宗事)는 한사람이 계속(繼續)해 나갈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후진(後進)들이 대(代)를 이어 종무(宗務)를 이어 갈 수 있도록 후진(後進) 스르로 알아서 배우고 익혀 종무(宗務)의 연속성(連續性)이 이어지도록 협력(協力)해 줄 것을 당부(當付)하였고 원로(元老)(이관식 李寬植, 31세(世)) 격려사(激勵辭)에서는 새해에 모두 건강(健康)하고 이 지역(地域)에서 모범(模範)이 되는 종중(宗中)이 되길 희망(希望)한다는 덕담(德談)의 말이 있었다. 이어서 종무국장(宗務局長) 이재형(李在衡 33세(世))의 진행(進行)으로 척사대회(擲柶大會)에 대한
우리투데이 이승일 기자 | 부산이 주사무소로 되어있는 고성이씨대종회 이삼열 회장이 회장 취임하면서 한푼도 안내고 회장 감투만 쓰고 있는 사실이 확인되어,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게다가 그동안 '고성이씨대종회'를 이끌었던 전임 대종회장들, 특히 부산지역에 거주하는 회장들 또한 회장을 하면서 한푼도 안내고 회장 감투만 써와서 현재 '고성이씨대종회'는 재정이 궁핍한 상태인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고성이씨 청장년층과 종친들사이에서는 더이상 '부산지역'에서 회장이 나오던 관행을 타파하고, 타지역에서 젊은 청장년층이 '고성이씨대종회'를 이끌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또한 그중에는 2~3천만원에 해당하는 대종회장 기탁금이 아니라 심지어 5천만원의 기탁금도 낼수 있다는 의견도 나와 한푼도 안내고 대종회장 감투를 쓰고 있는 현 대종회장에 대해 탄핵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고성이씨대종회 이삼열 회장은 작년 2022년 12월 27일 정기총회를 거쳐 연임이 결정됐지만, 연이어 터진 논란으로 사퇴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특히 고성이씨대종회 주사무소를 '부산'의 임대사무실로 무리하게 옮긴 사실이 발각이 되어 더욱 입지가 좁아진 상태이다.
우리투데이 이승일 기자 | 인천 강화군 '강화뉴스'가 벌인 이번 '사기극'은 언론으로써 더이상 역할을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첫째로 박흥열 전 발행인은 '지역신문 발행인/편집인'이란 직위를 이용해 작년 6월 지방선거에 강화군가선거구에 출마해서 현수막까지 게시해놓고, 자신이 살지도 않았던 강화군나선거구로 옮기는 등 추잡한 행동으로 물의를 빚었다. 게다가 본지와의 카톡대화에서도 자신의 '지면신문' 발행인이 아직도 '박흥열'로 되어 있다고 질의를 하자 그건 본인은 사직한것은 맞고, 정기간행물 등록변경은 '박제훈 편집국장'에게 알아봐야한다고 발뺌을 한다. 박흥열 전 발행인은 현재 강화군의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자진사퇴'는 안할것이라고 밝혔다. 두번째는 박제훈 편집국장은 더욱 가관이다. 본지와의 카톡대화에서 "게을러서 변경 등록을 못했다"라고 했던 박제훈 편집국장의 말은 거짓임이 드러났다. 게을러서 변경신청을 못했다고 하면서 강화뉴스 신문(114호, 2022년 4월 20일자)에는 재빠르게 '박흥열'이란 이름 대신 '이필완'으로 고쳐놓은것이다. 게으른 사람이라면 지면신문 찍을때도 '박흥열'로 신문 발행을 했었어야지, 왜 정기간행물 등록증에는 '박흥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