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투데이 차한지 기자 | 인천역 1번출구를 나오면 휭단보도 건너에 차이나 타운이 있다.
차아나 타운은 우리 근대사를 간직한 곳이다.
조선말 임오군란이 발생하고 중국은 조선의 요청이 없었는데 산둥성에 주둔하는 수군을 파견하였는데 상인이 함께 따라오며 장기체류를 하며 인천 차이나 타운에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조선말 인천 제물포가 개항지로 지정되며 조계장정이 체결되어 지금의 차이나 타운은 청나라의 조차지가되어 차이나타운이 생기는 계기가 되었다.
1971년 대한민국 정부는 외국인이 한 가구에 200평 이하의 주택 한 채와 50평 이하의 점포 한 채만을 보유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외국인 토지 취득 및 관리에 관한 법〉을 시행하였다. 이 때문에 화교들이 운영하는 대규모 음식점과 자영업은 큰 타격을 맞았다.
서울의 태화관 인천의 공화춘과 같은 대형 음식점은 문을 닫았다. 이후 중국음식점은 영세한 규모를 면하기 어려웠다. 1973년 정부는 분식 장려를 명목으로 중국식당에서 쌀밥을 팔지 못하게 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중국식당은 밀가루를 밥알처럼 때어 말린다음 쪄서 볶음밥을 만들어야 했다. 화교 단체들의 진정으로 3개월만에 쌀밥 판매가 재개되었지만 화교들은 큰 심리적 위축을 받게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의 갖가지 규제를 견디지 못한 화교들은 한국을 떠나 미국과 대만 등지로 이주하기 시작하였고 화교 인구 자체가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 중반에서 1980년대 말까지 차이나타운은 쓸쓸히 퇴락해가는 곳이었다.
인천항의 여객터미널과 어시장 등이 연안부두로 이전하면서 상권을 잃었다.
인천 차이나타운에 새로운 부흥이 일기 시작한 것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를 맺은 1990년대 후반의 일이다.
또한, 2001년 문화관광부가 차이나타운을 관광특구로 지정하고 근대문화재를 제정비하면서 관광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자장면은 공화춘에서 시작되었는데 지금의 공화춘은 엤 원조 공화춘이 아니고 명성과 이름만 생긴 2.000년대 부터 운영하는곳 입니다.
최초의 공화춘 사람들의 명맥을 유지하는 곳은 현재 3대손이 신승반점으로 운영하고 있는곳 입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자장면을 개발한 공화춘 건물은 청나라 시대 건축양식으로 1908년 무렵 지어지고 1912년 처음 자장면을 만들어 팔기 시작 한곳입니다.
현재 공화춘 건물은 자장면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